한국의 등반가

2009년 한국산악대상 등반가 김세준

써미트 2009. 12. 22. 13:39

등반가 김세준

 

 

 

메루피크 정상에서, 하늘의 길을 열었다는 성취감에 눈물을 흘리다

지난해 7월 김세준은 인도 히말라야의 메루피크 북벽을 등반했다. 메루피크는 에베레스트(8,848m)나 K2(8,611m)처럼 이름난 8천 미터급 고봉은 아니지만, 높이 600m 높이의 북벽은 당시까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험난한 벽이었다. 메루피크 북벽에 도전한 김세준과 왕준호, 김태만 세 클라이머는 벽 등반 기점까지 장비와 식량을 올리고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북벽은 먹구름 속에 얼굴을 감춘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며칠간 기다리다 식량이 아슬아슬해지자 김세준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단 한번의 시도로 정상까지 밀어붙이자는 계획이었다. 세 대원은 7월 5일 C2(6,150m)를 출발한 이래 13일까지 자벌레 같은 오름짓을 매일 매일 거듭했다. 바위틈에 박힌 눈과 얼음을 파내며 암벽을 오르는 것만도 고통스런 일이건만 총알 날아가는 소리를 내며 퍼붓는 낙석과 스노 샤워(snow shower, 눈가루가 퍼붓는 현상)는 툭하면 긴장케 하고, 어렵사리 설치한 확보물이 빠질 때는 1,000m 아래 빙하로 처박히는 듯해 심장이 콩알만해지곤 했다. 추락의 공포로 인한 극도의 긴장은 몸을 마비시켰다.

 

빙하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암벽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면 허공침대를 설치해야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친 뒤 드러눕는 허공침대는 따스한 방 이상으로 안락했다. 하지만 쇠못 두세 개에 매단 허공침대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대도 기우뚱거려 가슴 졸이게 했고, 눈보라가 치면 침낭뿐 아니라 얼굴마저 허옇게 덮어 온몸이 얼어붙게 했다. 매일 새벽 첫 등반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두 사람이 허공침대에서 짐을 정리하는 사이에 한 사람이 등반에 나섰다. 어느 날 김세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졸음이 덜 깬 상태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로프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김세준은 미사일이 발사되는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선등에 나선 왕준호가 추락하면서 로프가 딸려나가는 상황이었다. 곧 로프가 팽팽해지면서 왕준호는 줄에 거꾸로 매달렸다. 왕준호는 한 시간 반이나 오른 게 허사가 됐다며 욕 한번 해대는 것으로 추락의 충격을 떨쳐 버렸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온 몸에서 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등반을 해야 하는 것 또한 고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등반 8일째, 모든 식량이 떨어지고 말았다. 1주일로 예상하고 나선 등반이 뜻밖에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굶주림은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이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것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헛구역질은 속을 또 다시 뒤집어놓았다. 그래도 김세준 대장과 왕준호, 김태만 대원의 머릿속에 포기란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한 치 한 치 내 손으로 잡는 바위는 태초이래 처음 잡는 미지의 세계이기에 흥분이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정상에 서게 되리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김세준은 후배 두 명과 함께 북벽 세계 첫 등반이란 기록을 세우며 메루피크 정상에 올라섰다. 후배들과 부둥켜안자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서 벌인 사투였지만 또 하나의 길을 완성시켰다는 성취감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늦게 시작한 등반, 그러나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김세준은 짧은 기간에 거벽 클라이머의 반열에 오른 산악인이다. 그가 산에 입문한 것은 이제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1969년 여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경북 기계공고를 나온 김세준은 군 복무를 마친 뒤 1991년부터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 속에서 성장해온 그는 큰돈을 벌고 싶었다. 유통업에 종사하며 몇 년간 일을 배운 뒤 작게나마 사무실을 차려 직접 납품을 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10년쯤 애를 쓰자 자리가 잡혔다. 한데 몸은 말이 아니었다. 거래처 사람들과의 만남은 으레 술자리로 이어졌고, 횟수가 잦아질수록 몸은 엉망이 되어갔다. 5년쯤 헬스에 열중해 몸에 대해 자신감이 생길 즈음인 1998년 1월, 스포츠 신문에 실린 클라이머 부부 최승철(98년 탈라이사가르에서 추락사)-김점숙씨의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의정부 부대고기 골목에 위치한 건물 지하 실내암장에 들어서자 몇몇 사람이 난로에 둘러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시간 까먹고 있는 곳이다 싶었다. 당시 샤모니 실내암장의 회원들은 스포츠 클라이밍뿐만 아니라 암빙벽과 인공등반 등 등반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지닌 클라이머들이었다. 그 날 이후 김세준은 스포츠 클라이밍을 배우다가 한밤중에 의정부 근교의 폭포로 이동해 자동차 라이트 불빛 아래 빙벽등반을 하는가 하면, 주말이면 고난도 암벽을 찾아 다니는, 도깨비 같은 등반 세계 속에 빠져들었다. 


 

“해외 거벽등반의 기회도 매우 빨리 찾아왔어요. 등반을 배운 지 1년만인 1999년 캐나다 부가부를 찾았죠. 하지만 기껏 해야 100여m 높이의 암벽을 오르던 제가 600~700m의 대암벽을 마주했으니 결과는 빤했죠.” 그는 귀국 후 이미지트레이닝에 열중하면서 대암벽에서 짐을 끌어올리는 법, 좁은 공간에서 자일을 처리하는 법, 그리고 대상지를 선정하고 원정을 꾸리는 법 등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그러다 2000년 당시 여성 최고의 클라이머로 손꼽히던 김점숙, 채미선씨와 함께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대암벽 엘 캐피탄에 도전하고, 이듬해 2001년 히말라야로 눈길을 돌렸다. 파키스탄 밴타브락 산군의 오거 섬(5,600m)에 새 루트를 낼 욕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드러나고 말았다. “엘 캐피탄은 이미 만들어진 루트를 따르면 되지만, 오거 섬은 처음부터 길을 찾아야 했기에 어려웠어요. 어마어마한 낙석에 간을 콩알만하게 위축되기도 했고요. 정말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로 힘들었어요. 무엇보다 고소증이 힘겹게 했어요."

 

또다시 새로운 스타일의 훈련에 들어갔다. 모래를 20kg 넘게 집어넣은 배낭을 메고 동네 뒷산인 수락산을 뛰어다녔다. 숨이 더욱 가빠지게 하려고 마스크를 쓰고 달렸다. 고소를 이겨내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런데 운동이 과했던지 2001년 봄 인공암장에서 다친 허리 상태가 더욱 나빠지더니 결국 허리에 칼을 대야 했다. 2002년 2월 디스크 수술을 받은 지 한 달쯤 지나 허리가 괜찮아진 것 같자, 그는 몸 상태를 테스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도 엉뚱한 계획이었다. “앞으로 계속 산에 다닐 수 있을까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엘 캐피탄의 로스트 인 아메리카(Lost in America) 단독 등반에 나섰어요. 9일이나 걸렸어요. 말 한마디 나눌 상대 없이 1,000m 수직 암벽을 오르자니 정말 외롭더군요. 10m를 추락한 적도 있어요. 허리에 통증이 오지 않자 오히려 기뻤어요. 계속 등반해도 된다는 진단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메루피크 북벽에서 ‘아무도 오르지 못한 거벽에 길 내는 등반가의 꿈’을 이뤄내다


엘 캐피탄 등반을 마치고 선후배들과 함께 유럽 알프스의 침봉을 등반한 그는 2003년 다시 파키스탄을 방문해 나와즈브락(5,800m)에 익스트림 투게더(A5)라는 신 루트를 개척하고, 2004년에는 캐나다의 배핀 섬(Baffin Island) 원정에 나섰다. 2004년 당시 김세준이 이끈 배핀 섬 등반은 히말라야 고산등반 이상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히말라야나 알프스, 요세미티 정도에 머물던 한국 산악인이 신선한 대상지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세준 대장과 왕준호․김팔봉 세 산악인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원정대는 세계의 최고 오지에서 100일간 버티며 표고 차 1,000m의 키구티(Kiguti)와 600m의 핀(The Fin) 거벽에 초등루트 2개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배핀 섬 등반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김세준은 이듬해 2005년 눈을 파키스탄 히말라야로 돌려 메루피크 중앙봉(샥스핀, 6,450m) 등반에 나섰다. 그러나 연이은 악천후 속에서도 40일간 버티며 전진캠프와 고정로프를 설치한 다음 벽 등반에 나섰으나 등반 사흘째 퍼붓기 시작한 폭설에 이틀간 갇혀 있다 끝내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김세준은 꺾이지 않고 2006년 중국 쁘딸라피크, 2007년 파키스탄 투이줌 등반을 통해 기량과 경험을 한층 높인 뒤 지난해 메루피크 주봉 북벽 등반에 나섰던 것이다. 메루피크 주봉 북벽 원정은 아무도 오르지 못한 거벽에 길을 내보자는 등반가의 꿈이었다. 거기서 그는 북벽을 타고 마침내 하늘로 오르는 길을 열고 말았다.

  

지난 10년간 익스트림 라이더 등산학교 강사로서 인공등반과 고산거벽 등반 기술 전수에 애써온 김세준은 인공등반의 매력은 맨손으로 행하는 자유등반으로는 불가능한 구간을 첨단의 확보장비를 써가면서 등반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배핀 섬 등반 때 500m 높이의 암벽에서 구멍 8개를 연속으로 파내며 올랐어요. 지름 10mm 구멍에 장비를 걸어봤자 얼마나 큰 힘을 받겠습니까. 체중이나 겨우 견뎌줄 정도죠. 그렇게 아슬아슬한 동작을 여덟 번 연속으로 하다 보면 정말 긴장됩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옮기고,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다음 구멍을 파내고, 또 한 발 옮기고. 정말 살 떨림의 연속이지요. 하지만 쾌감은 대단합니다.” 등산학교 강사로서 김세준은 2006년 여름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인제 한계리 수해 때, 동료 강사들과 함께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급류에 휩쓸릴 위기에 몰린 주민 수십 명을 로프를 이용해 구해내기도 했다. 이 역시 여러 해 동안 갈고 닦은 등반 기술이 큰 몫을 해냈다

 

 

대한민국 산악대상에 빛나는 김세준, 아직도 그가 도전할 벽은 남아있다

메루피크 주봉 북벽 등반의 가치를 높게 인정받아 지난 9월 국내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산악상인 ‘대한민국 산악대상’을 수상한 김세준은 그 스스로 ‘살 떨림의 연속’이라 표현하는 험난한 등반을 앞으로 4년쯤 더할 생각이다. 4년간 그린란드 오지의 대암벽을 오르고, 파키스탄과 인도 히말라야의 험난한 고봉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우선 내년 봄 파키스탄의 미등봉(未登峰) 라톡1봉(7,145m)에 도전한다. 이를 위해 지난 7월 정찰 등반을 다녀왔다. “라톡1봉은 1978년 미국의 제프 로우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등반가들이 30년 동안 도전해온 난봉이에요. 정면으로 보는 순간 어마어마한 거벽에 몸이 굳어 버렸어요. 암벽의 표고 차만 2,500m에 이르거든요. 히말라야 거벽과 영적으로 통하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겉모습에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서는 걸 보면 사이코 기질을 가진 안전 불감증 환자인가 봐요. 4년 간 계획한 등반을 마치고 나면 즐기는 산행을 할 거예요. 솔직히 그 후 어떻게 먹고 살까 걱정이 되요. 그렇다고 생각을 멈추고 먹고 사는 일에 만 매달리면 나중에 더 후회할 것 같아요. 어쩌면 극한과 위험을 갈구할 때 생기는 아드레날린이 배고픔을 채워주는 식량인지도 모르겠어요.”

 

 

 

한필석 / 월간 <山> 기자 월간
1990년 월간 <山>에 입사한 후 국내외 오지와 산, 산악인 소개에 힘써왔다. 탐험과 고산등반을 좋아한다. 2006년부터 세계 5대륙 최고봉에 도전해 유럽 엘브루즈, 남미 아콩카구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북미 매킨리를 등정했다. 2007년 에베레스트 실버 원장대를 동행 취재했으며,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해발 8,000m)까지 등반했다.

사진 제공 김세준, 월간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