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반가

남들이 가지 않은 험한 길을 간다 등반가 박정현...

써미트 2009. 11. 25. 09:14

등반가 박정헌

 

 


 

 

박정헌은 우리나라 고산 거벽등반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인물이다. 히말라야의 난벽으로 꼽는 안나푸르나 남벽(8,091m. 1994년)과 에베레스트 남서벽(8,8848m. 1995년)을 오른 것은 물론, 2000년에는 K2(8,611m) 남남동릉을 무산소로 등정했다. 2002년에는 시샤팡마(8,027m) 남서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2005년 네팔 히말라야의 촐라체 북벽 등정에도 성공해 한국 등반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기도 희박한 히말라야의 고봉에서 남들이 피하는 위험한 곳을 오르는 일은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미친 짓’이다. 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르다. 높은 고도에서 펼치는 고난도 벽 등반은 알피니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경외와 존중의 대상이다. 처음부터 고산 거벽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선배들에 이끌려 히말라야를 찾으며 산에 눈을 떴고, 남들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생각에서 거벽등반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냥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어렵고 험준한 코스에 도전하는 일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박정헌이 등반의 맛을 본 것은 비교적 어린 시절이다. 경남 사천의 바닷가 출신으로 중학교 때부터 산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삼천포산악회에 가입하며 와룡산 바위 오르기에 빠져들었다. 마도로스의 꿈을 품고 부산선원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바위와의 질긴 인연을 끊지 못해 매주 산을 찾아갔다. 실력도 일취월장해 전국암벽등반대회에 출전해 4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고교시설 인수봉 연장등반과 국내 최대 빙폭인 설악산 토왕폭을 완등하는 재능을 뽐냈다. 경남지역에서 무서운 십대로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히말라야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눈썰미 좋은 선배들은 1989년 18세에 불과했던 그를 히말라야 초오유(8,201m) 원정에 데리고 간다. 그것도 추운 겨울시즌에 어렵다는 남동벽 코스에 붙였다. 이 등반은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하지만 이 경험은 그에게 히말라야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계기가 됐다.

 

군 복부로 잠깐의 공백기 가진 박정헌은 제대 후 곧바로 경남연맹 원정대에 참가했다. 이번에는 히말라야 3대 난벽(難壁) 가운데 하나인 안나푸르나 남벽이 대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안나푸르나 등반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대원 가운데 유일하게 정상에 오르기는 했지만, 현지인 셰르파의 도움에 의존했던 등반이었기 때문이다.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 이후 그는 좀더 주도적인 등반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체력과 등반기술을 향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은 물론이다. 그 결과는 이듬해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에서 빛을 발했다. 다시 한 번 경남연맹 소속으로 등반에 참가한 그는 선봉에 서서 난코스를 돌파해 대원들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의 쾌거 뒤에는 젊은 박정헌의 공이 컸다.

 

 

 

고산 거벽 등반은 많은 위험이 따르는 행위다. 작은 손짓 하나에도 목숨이 좌우될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산을 오르던 박정헌에게 그런 위험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신들린 듯 여러 개의 고산을 연이어 오르기 시작했다. K2 남남동릉 무산소 등정, 시샤팡마 남서벽 신루트 등정, 가셔브룸 2봉(8,035m) 남남동릉 등정과 패러글라이딩 하산까지, 그의 진보적인 등반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많은 이들의 극찬을 들었지만, 2005년 촐라체(6,440m) 북벽 등반은 박정헌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된다.

 

등반에 성공했으나 하산 도중 부상을 당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것이다. 히말라야의 난공불락으로 불리는 이 거벽은 등반이 시작되는 해발 4,900m 지점에서 정상까지 고도차가 1,500m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예전에 프랑스팀이 등반에 성공했지만, 고정로프와 여러 개의 캠프를 설치하며 올랐다. 알파인 등반으로 벽을 돌파한 박정헌 팀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그는 후배 최강식(30.경상대 산악부)과 촐라체 북벽을 속공으로 오르기로 계획하고 네팔로 떠났다. 충분한 적응 훈련을 거친 뒤, 두 사람이 수직의 거벽을 어렵게 타고 넘어 촐라체 정상에 섰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나흘 만에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등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산 도중 최강식이 커다란 얼음 틈 사이에 빠지며 두 사람 모두 심한 부상을 당한 것이다. 박정헌은 묶고 있던 줄이 몸을 휘감으며 갈비뼈가 부러졌고 손에는 동상이 심했다. 최강식은 두 다리가 모두 부러져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산악 논픽션 문학의 백미로 꼽는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이 책은 1985년 페루 안데스 산맥의 시울라그란데(6,400m) 서벽 등반 중 일어난 사고를 글로 옮긴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생환 드라마는 하산 중에 크레바스에 떨어진 동료를 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파트너가 줄을 잘라 버린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박정헌은 두 사람을 묶은 끈을 풀지 않고 후배를 살려냈다. 두 사람은 얼음 바닥을 기고 추락하며 간신히 안전지대로 내려왔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이틀 밤을 노지에서 보낸 끝에 산을 빠져나온 것이다. 등반은 성공했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박정헌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손가락 여덟 개를 한두 마디씩 절단하고 일부 발가락도 조금씩 잘라 냈다. 최강식은 양쪽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절단해야 했다.

 

 

 

뭉툭해진 그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눌 때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얻은 고통의 흔적치고는 가혹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낙천적인 산꾼은 “아직 엄지손가락은 멀쩡하잖아요” 하며 씩 웃는다. 사실 거벽 등반가로서의 그의 이력은 촐라체 북벽에서 막을 내렸다. 그가 추구했던 고난도 거벽 등반은 이제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사고 이후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촐라체의 경험을 담은 ‘’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한동안 많은 강연회에 불려 다녔다. 하지만 반복되는 생활 가운데 고민과 갈등이 심해졌다. “고향과도 같은 산을 떠나야 한다니 막막하더군요. 목표가 사라지니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8천 미터 14개봉을 완등하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똑같은 길을 가는 것은, 제가 해온 일에 대한 ‘윤리적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키지 않았습니다.”

 

촐라체 사고 다음해인 2006년, 그는 머릿속의 혼돈을 떨치기 위해 장거리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유라시아 횡단팀에 합류해 중국을 가로질러 파키스탄까지 달리는 여정이었다. 단순한 몸놀림이 반복되는 생활은 안개 속처럼 뿌옇던 정신을 깨어나게 했다. 그는 자전거 여행을 통해 촐라체가 준 장애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기회임을 간파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촐라체에서 얻은 교훈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제가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요즘 그는 바쁠 때는 한 달에 20일씩 강연을 다닌다. 강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히말라야 등반에 비유한 경영과 리더십에 대한 강의도 단골 메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경영의 등로주의’를 강조한 내용이다. 최근에는 등산을 학문으로 체계화시켜 널리 전파하는 프로젝트도 계획 중이다. 등산이 무모한 행위가 아님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싶다는 욕심에서 시작한 일이다. 사고 이후 더욱 바빠진 그다.

 

 

 

히말라야는 여전히 박정헌에게 도전의 대상이다. 강연의 주제가 될 뿐만 아니라 타고 넘어야 할 산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는 패러글라이더로 히말라야의 하늘을 수시로 날고 있다. 당연히 패러글라이딩도 그가 추구하던 ‘등로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그는 남들이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히말라야 크로스컨트리’라는 개념을 비행에 도입했다. 패러글라이딩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산봉을 연결해 넘어가겠다는 것이다. “등반이 2차원적 행위라면, 비행은 3차원적 도전입니다. 히말라야라는 대상은 바뀌지 않고 차원이 추가된 것이지요. 예전에 가셔브룸에서 패러글라이딩으로 하산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항공기를 타거나 걸어가서는 절대로 체험할 수 없는 전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 크로스컨트리 비행은 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모험이다. 기후와 바람은 물론 상승 속도와 고도, 산소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다. 그는 연구와 실험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또한 이 계획과는 별도로 가셔브룸 1봉(8,068m)과 2봉(8,035m)을 비행으로 연결해 24시간 내에 모두 오르는 프로젝트도 기획중이다. “제가 해보고 싶은 마지막으로 등반입니다. 두 산의 거리와 높이를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비행을 접목한 8천 미터 봉우리 연장등반’으로 히말라야 등반 경력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촐라체 사고가 없었다면 지금쯤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이 물음에 그는 “아마 히말라야의 어떤 벽에서 떨어져 죽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촐라체 북벽 등정 이후 그는 모든 산이 낮아 보일 정도로 자신감에 찼다고 한다. 하산 도중 사고만 당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한국적 과제였던 인도 히말라야의 탈레이사가르에 도전했을 것이다. 그 후에는 눕체 북서벽으로, 그리고는 좀더 어렵고 위험한 곳을 찾았을 것이다. “자꾸 어려운 곳에 매달리다 보면 언젠가 사고를 당했을 겁니다. 종교는 믿지 않지만,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리던 열차를 누군가가 적당한 곳에 세워줬다고 생각합니다. 산에서 내려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지요. 이제 저는 히말라야를 알리고 그 가치를 널리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그는 촐라체 사고 이후의 인생을 ‘제2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 전에는 개인주의에 치중한 알피니즘의 틀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사회에 융화하는데 더 큰 가치를 두려고 한다. 사고 이후 스스로도 많이 무뎌졌다고 말하는 그는 확실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히말라야 거벽등반가 박정헌의 ‘등로주의’ 정신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펼치는 새로운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다.

 

 

 

월간 산O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