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반가

히말라야 상공의 빛나는 세 번째 성좌 한왕용

써미트 2009. 11. 27. 13:57

 

등반가 한왕용

 


 

한왕용은 히말라야가 암시하듯 거칠고 억센 사람이라기보다 부드럽고 인간미 넘치는 산악인이다. 1995년 그는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했다. 초오유(8,201m)에 이은 두 번째 거봉 등정이었다. 93년에 첫 도전에서 실패한 이후 두 번째 도전에서 이룬 세계 최고봉 등정이었기에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그러나 정상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얼른 안전지대로 내려야 하는데. 등에 짊어진 산소통의 산소가 바닥나기 전에 한 발짝이라도 더.’ 긴박한 상황에서 해발 8,750m대에 20여m 높이 암벽을 거의 다 내려설 즈음 무전이 왔다.

 

“뒤따라 내려오는 한국대원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데리고 내려올 수 있겠냐?” 박영석 대장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다른 한국 팀 대원들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베이스캠프에서 전해진 무전이었지만 ‘우리 팀도 아닌데’ 하는 생각에 곧장 캠프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가면 분명 죽을 텐데.’ 그는 보름 이상 북동능선으로 등반하다가 노스콜 루트로 변경했고, 이후에도 첫 번째 정상 공격에서 실패하고 두 번째 공격에서 정상에 섰기에 체력이 바닥날 대로 바닥나 있었다. 인간으로서, 암벽은 도저히 다시 올라갈 수 없었다. 대신 해발 8,700m 고지에서 5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다. 마침내 힘이 다한 한국 대원 하나가 히말라야 현지의 셰르파 도움을 받아 간신히 암벽 아래로 내려왔다. 한왕용은 그때부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한국 대원을 데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가며 안전지대까지 이끌고 내려왔다.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는 온몸에 에너지란 에너지는 다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흡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8,700m대에서 있었던 이 일은 산악계에서 한왕용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가 다른 등반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1996년 여름 천산산맥 포베다(7,439m)에서도 위험한 상황에 빠진 타 원정대 대원을 살려내고, 1997년 가셔브룸1봉(8,068m)에서는 정상 정복 후 하산 길에 크레바스(crevasse, 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진 동료 대원을 구출해 베이스캠프까지 데리고 내려왔다. 그러다 그 자신도 결국 위기를 맞고 만다. 2000년 K2 등반 때였다. 그로서는 9개째 거봉에 도전하는 등반이었고, 같이 나선 선배 산악인 엄홍길의 14개 거봉 완등을 마무리 짓는 등반이었다.

 

베이스캠프 도착 이후 근 두 달간의 등반에도 불구하고 악천후 때문에 등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7월 31일 한왕용은 드디어 ‘산중의 산’ K2(8,611m. 파키스탄) 정상에 올라섰다.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중 등반이 가장 어렵다는 산인데다 인공산소의 도움을 받지 않은 등정이었기에 기쁨은 배가되었다. 그러나 대가가 컸다.

 

사흘 뒤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내려선 그는 하룻밤 묵고 텐트 문을 나서는 순간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팀 닥터인 신경외과 전문의의 응급처치와 헬기 후송 등 긴박한 과정을 거쳐 귀국했을 때에야 컨디션이 돌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며칠 뒤 또다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통증을 느낀 그는 결국 혈전으로 막힌 뇌혈관 확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수술은 무난히 끝났으나 담당의사는 암담한 진단결과를 내놓았다.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지 모른다”는 진단이었다.


 

한왕용은 침통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불구의 신세로 가족에게 피해를 주며 살 바에는 차라리 K2에서 돌아오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병원비 걱정을 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스럽기도 했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여기서 산을 그만둔다면 산만 다니며 살아온 내 인생에 남는 게 아무 것도 없겠다’ 싶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산 오르는 일인데.’ 하느님께 빌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딱 한 번 만 고산 등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이후 정말 조심했어요. 혈전용해제와 비상용 산소를 꼭 가지고 다녔으니까요. 다행히 2001년 봄 마칼루(8,463m), 가을 시샤팡마(8,027m) 그리고 2002년 봄 칸첸중가(8,586m)에 이르기까지 순조롭게 등정이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2002년 여름 브로드피크 등반을 실패하고 나니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거예요.”

 

 

 

대한민국은 1등만 존재하는 나라였다. 2000년에는 엄홍길이, 2001년에는 박영석이 14봉 완등자 대열에 올라섰다. 한왕용은 성공한다 해 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 번째였다. 결과가 뻔히 그럴 텐데 14좌 완등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이미 끝난 14좌 완등에 사활을 거는 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바보 아니냐’고 비웃는 같았어요. 제가 원정 나갈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이 늘 불안해 해서 미안했어요. 그래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2003년 여름 가셔브롬2봉과 브로드피크 등반에 나섰어요.”

 

한왕용은 그 마지막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집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너무도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가셔브룸2봉 등정 후 베이스캠프로 내려서던 중이었다. 짙은 안개에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헤매던 중 갑자기 한쪽 발이 쑥 빠지더니 곧 몸이 허공을 갈랐다. 크레바스였다. 군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보낸 어린 시절, 바위도 제대로 못 타고 짐도 잘 못 진다 하여 구박받던 우석대 산악부 시절, 마칼루(8,463m) 등반 중 돌아가신 어머니,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항아리처럼 생긴 크레바스 속에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위에서 로프를 끌어당기고 밑에서 등강기를 이용해 밖으로 빠져 나오기까지 30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대원들이 안전벨트를 풀러 주고 동상에 걸린 손과 얼굴을 마사지해 주는데도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나 서러웠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나 싶었다.

 

 

 

브로드피크 등정 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제3캠프(7,400m)를 내려선 지 얼마 안 돼 한쪽 아이젠이 다른 쪽 바지에 걸리면서 넘어지는 순간 1,000m 아래 빙하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휘두른 피켈이 설사면(눈 비탈)에 박히면서 추락이 멈췄어요. 하늘이 도우신 거죠. 하지만 정신이 없었어요. 정말 엉금엉금 기었어요. 그렇게 해서 안전지대로 올라섰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거예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어요.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 물고 조심스럽게 내려서는데 이번에는 안개가 끼지 뭐예요.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다시 제3캠프로 올라갔죠. 그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95년 초오유를 시작으로 2003년 브로드피크로 마무리 짓기까지 한왕용의 8,000m급 14개 거봉 등정 과정은 이렇게 죽음을 무릅쓴 도전의 역정이었다. 그래도 14좌 완등이라는 대업을 뭔가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기력증에 빠졌다.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 할 일이 없어진 거예요. 몇 달간이지만 정말 힘들었어요. 목표를 잃었던 거요. 그러던 어느 날 머리가 번쩍 하지 뭐예요. 2002년 브로드피크 원정 때 일본 K2 팀 대장의 말이 떠올랐어요.”


 

2002년 여름 브로드피크 등반 중 날씨가 나빠 베이스캠프에 머물던 한왕용은 두어 시간 거리인 K2 베이스캠프에 놀러 갔다 얼굴이 빨개졌다. “일본팀 대장이 제2캠프에서 주워온 캔에서 나온 음식이라며 내놓는 거예요. 2000년 K2 등반 중 내가 버린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정말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히말라야 14개 거봉 청소 등반이예요.” 한왕용은 2003년 가을부터 지난 가을에 이르기까지 14개 거봉 청소등반에 나섰다. K2는 제3캠프(7,000m), 에베레스트는 마지막 제4캠프(8,000m)까지 올라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텐트와 쓰레기를 끄집어내 끌어내려 세계 산악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한왕용은 지난해 가을 세계적인 미국 환경단체인 US LNT(Leave No Trace)에서 실시하는 환경교육을 받았다. 1주간의 교육을 통해 환경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웠다. 올해는 대한산악연맹 환경보전이사로 임명되었다. 이제 한왕용은 등반가가 아닌 지구 청소부로 또다시 세계의 고봉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14좌 완등으로 나의 탐험과 등반은 끝난 것이다 생각했어요. 겁도 나고 앞장서서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등반 모습을 보여줄 자신을 잃은 거예요. 이제 더 험난한 등반과 탐험은 기량이 뛰어난 후배 산악인들 몫이다 싶고요. 대신 후배들, 후손들을 위해 산을 아끼자 결심한 거예요. 탐험에 대한 욕심은 더 이상 없어요. 할 만큼 했다 생각하니까요. 단지 바람이 있다면 제가 14좌 완등자보다는 정말 산을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월간 산O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