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반가

등반가 김창호...

써미트 2009. 8. 11. 15:12

 

 

 

 

 

 

“핑!” 2004년 7월 6일 오후 3시30분. 파키스탄의 오지 발타르 빙하의 바투라2봉(7762m)을 탐사하던 김창호는 무더위와 갈증에 지쳐 빙퇴석지대에서 막 빠져 나오던 터였다. 귓가에 소리가 스쳤다.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험하게 생긴 자들이 권총을 쏜 것이었다. 은빛 총 끝에서 빛이 났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순간 또 한 발의 소리가 울렸다가 숲 속으로 가라앉았다. “주위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어요. 어느 순간 바로 옆에서 총소리가 나는 거예요. 고개를 들어보니까 험상궂게 생긴 세 사내가 저를 쳐다보곤 총을 또 한 발 쏘는 거예요. 겁을 준 거죠.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더군요.” 마을에서 사람을 죽이고 경찰을 피해 빙하 깊이 도망쳐온 자들이었다. 이들은 10m쯤 가더니 되돌아왔다. 김창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제발, 제발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땅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외쳤어요. 5분쯤 가만히 있으란 뜻 같았어요. 그러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는데 졸졸거리는 물소리도 들리고 태양 빛에 눈이 부셨어요. 그러자 화가 나는 거예요.”

 

김창호는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 싶었다. 하지만 한 달 넘게 카라코람 히말라야 곳곳을 촬영한 필름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는 화가 치밀었다. “3일 후 경찰들과의 총격전 끝에 세 명 모두 붙잡혔어요. 재판 받겠다고 시달린 한 달이 너무너무 지긋했어요. 그러다 보니 고통과 상처를 준 그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벗어 던지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야 내 자신이 자유로워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용서해주겠냐는 판사의 물음에 대답했죠. 그들을 용서합니다. 판사님.” 김창호가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픈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다음해 오를 낭가파르밧(8125m)을 하루 빨리 보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김창호는 경북 예천서 태어나 영주 중앙고를 졸업한 뒤 1988년 서울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우연히 산악부에 입회한 김창호 역시 출신의 여느 산악인들과 비슷하게 국내산에서 등산을 배웠고, 거기서 싹튼 열정을 히말라야 설산 등반으로 이어나갔다. 대학시절 김창호의 히말라야 등반은 당시로선 매우 진취적이었다. 93년 도전한 그레이트트랑고타워(6283m)는 카라코람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대암벽이고, 96년 등반한 가셔브룸4봉(7925m) 동벽은 세계 최고난이도로 꼽히는 거벽이었다.

 

해병대 입대 후 ‘책상’ 보직이 주어지자 특수수색교육에 지원했을 정도로 고행을 즐기는 그지만, 덩치가 어마어마한 트랑고타워를 보는 순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베이스캠프에서 사흘거리인 대암벽 아래 올려놓은 20일치 식량과 장비가 눈사태에서 쓸려 사라지는 등, 초반부터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벽 등반 닷새 째 날에는 80여m나 추락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식량뿐 아니라 연료까지 떨어져 마실 물을 못 만들고, 그 바람에 탈수현상이 일어나면서 판단력까지 흐려졌다. 그런 상태로 등반을 시작한 지 14일만에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청나게 큰 설산들과 끝이 보이지 않는 빙하들이 눈앞에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귀국했을 때는 추락 당시 부러진 갈비뼈 두 개가 어긋난 채로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정상에서 바라본 빙하의 끝은 어딜까, 그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96년 가셔브룸4봉 동벽 때도 마찬가지였다. 틈만 나면 낯선 빙하로 들어섰고, 40~50년 전 초등반대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하고, 명봉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또 다른 등반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98년 김창호는 선후배와 함께 아웃도어용품 유통회사를 차렸다. IMF 직후였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나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대한 갈증이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지도에 나온 도로 끝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빙하 끝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하는 등의 상상이 꼬리를 물면서 잠 못 이룬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도 파키스탄 지도를 베야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파키스탄행을 결심했다. 출발 1년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지도를 보며 지형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탐험사와 등반사를 속속 들이 외웠다. 촬영 대상 산군과 산봉을 체크하고, 산명을 채록(採錄)하기 위해 파키스탄 히말라야 일원에서 사용되는 언어들 가운데 주요 단어는 달달 외웠다.

 

 

 

2000년 5월초, 파키스탄을 찾은 김창호씨는 도착하자마자 변을 본 뒤 휴지 대신 물로 닦아내는 현지인들의 생활문화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현지 음식에 입맛을 길들였다. 현지인들이 연료로 사용하는 쇠똥으로 불 피우는 법과 빵 굽는 법도 배웠다. 첫 번째 계획한 빙하를 1주일간 답사하고는 짐을 더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여벌 옷을 빼버리고, 하루 식량을 두 끼 이내로 줄였다. 정상속도로는 카라코람 히말라야 탐사에만 5년 이상 걸리리라는 생각에 이삼 일 걷는 거리를 하루에 해냈다. 무릎까지 차 오른 눈이 덮인 고개를 넘고, 칠흑 같은 크레바스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장대를 들고 빙하를 건너기도 했다. 퇴석지대나 얼음빙하 위에 쳐놓은 텐트 안에서 홀로 매서운 바람과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긴장하며 밤을 지내기가 부지기수였고, 빙하에서 길을 잃고 수천 길 낭떠러지 위로 올라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탐사를 가능한 한 빨리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허가 없이 탐사하다 경찰이나 군인에게 붙잡힌 적이 10차례가 넘었다. 호송 도중 경찰이 잠든 틈에 도망쳐 나와 1주일간 양치기들에게 우유와 빵을 얻어먹으면서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몸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나선 보름간의 탐사직후 그의 몸무게는 출국 당시에 비해 20kg 이상 줄어 있었다. 무거운 배낭과 굶주림에 시달린 게 원인이었다. 해서 중간중간 마을에 내려올 때면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어댔지만 다시 빙하로 들어서면 며칠 뒤면 또다시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곤 했다. 이렇게 7개월간에 걸쳐 치열하게 답사를 했는데도 아쉬움이 많았다. 큰 빙하와 큰 계곡은 거의 다 들어가 보았지만 눈이 깊어 넘지 못한 고개도 많고, 힌두쿠시 최고봉인 티리치미르 지역은 아예 접근도 못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1년 또다시 탐사에 나섰던 것이다.

 

 

 


김창호는 오랜 기간 동안 해낸 탐사를 통해 확인한 봉을 계획대로 하나하나 섭렵해갔다. 그 첫 번째가 2001년 여름에 2차 탐사에 앞서 나선 멀티피크 원정이었다. 거기서 그는 선후배들과 함께 카체브랑사(5560m) 세계 초등정과 혼로보피크(5500m) 신루트 등반에 이어 시카리(5928m) 신 루트 등정이라는 쾌거를 거두었다. 2003년에는 6000m급 고봉 단독등반에 나섰다. 이는 여러 해 전 세운 계획에 따른 원정이었다. 6000m급 설산에서 등반기술을 익히고 고독을 이겨내야만 더욱 큰 등반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거기서 그는 딜리상사르(6225m), 아타르코르(6109m), 하이즈코르(6105m), 박마브락(6150m) 등 6000m급 4개봉 단독 세계 초등정이란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쌓은 경험은 2005년 낭가파르밧(8125m) 루팔벽 중앙직등루트 세계 제2등이란 기록을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낭가파르밧은 1953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 될 때까지 31명이라는 많은 등반가가 목숨을 잃어 ‘죽음의 산(The Killer Mountain)’으로 불리는 봉으로, 중앙직등루트는 세계의 철인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 형제가 1970년 초등한 이후 두 번째 등정이었다.

 

김창호는 당시 동료 대원인 이현조(2007년 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사망)와 함께 등정 후 반대편인 디아미르 벽을 타고 하산하면서 환각에 빠지기도 했다. 막판 이틀간은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정상에 오른 이들은 탈진 상태였다. 이현조는 7800m 설사면에서 눈사태로 50여m나 추락하는가 하면 김창호는 7700m 지점에서 절벽을 만나자 뛰어내렸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그는 손에 잡고 있던 피켈과 안경, 랜턴이 날아가 버렸다. 이후 두 사람은 외국 원정대의 캠프에서 새나오는 불빛을 좇아갔다. “한 2시간 좇아갔을 거예요.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거의 초주검 상태에서 베이스캠프에 내려서서야 알았어요. 그 불빛은 정상을 향하는 외국 클라이머들의 헤드랜턴 불빛이었던 거예요. 내려서야 하는데 올라갔으니 완전히 맛이 갔던 거죠. 강도를 만났던 두 번째 답사 때 루팔벽뿐 아니라 디아미르벽을 살피면서 머릿속에 잘 그려 넣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 내려왔던 것 같아요.”

 

그는 2006년 파키스탄의 가셔브룸1봉(8,068m)과 2봉(8,035m) 연속등정에 이어 2007년 여름 세계 제2위봉인 K2(8611m)와 브로드피크(8047m) 연속등정에도 성공, 파키스탄 내의 8000m급 고봉 5개를 모두 올라섰다. 2008년에는 네팔로 방향을 틀어 마칼루(8463m) 무산소 등정과 로체(8516m) 무산소 최단시간 등정 세계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올 봄에는 네팔의 마나슬루(8163m)와 다울라기리(8167m)도 올라 8000m 9개 봉 무산소 등정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미지에 대한 도전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2008년 여름 히말라야에서 아직 인간이 정상을 밟지 못한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바투라2봉(7762m) 세계 초등정을 이룩했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미지의 설산을 세계인을 대표해서 올라선 것이다.

 

 

 

탐험과 등반에 몰입해 지내느라 결혼도 뒷전으로 미룬 채 마흔을 넘긴 그는 올 가을 안나푸르나(8091m) 등반 후 곧바로 중국 사천성 횡단산맥으로 가서 그로스베노르(6376m)와 지아지(6540m)란 이름의 고산 거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할 계획이다. 그리고 내년 봄 네팔의 캉첸중가(8586m)를 등반한다. 캉첸중가 역시 무산소로 등반이다(등반가들 사이에서는 해발 8400m를 넘는 고봉인 마칼루에서부터 인공 산소를 사용하지 않으면 무산소 등반이라 일컫는다). 때문에 한국 산악계는 김창호의 무산소 14개좌 완등이 머지않아 달성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2월부터 아웃도어 브랜드 몽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요즘 여러 해 동안 미뤄두었던 책을 내기 위해 컴퓨터 앞에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파키스탄을 갈 때 가져간 커다란 배낭을 수많은 탐사 서적으로 채워오곤 하는 그는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숨은 빙하와 숨은 봉우리들, 그리고 그가 험난한 빙하와 설봉을 오르면서 겪은 수많은 얘기들을 실을 생각이다.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이어 3년 전부터 중국과 티베트 히말라야를 다니고 있어요. 지구상에는 아직도 미지의 산과 빙하들이 많아요. 어느 곳을 찾든 처음 며칠은 불안해요. 그러다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험난한 빙하와 설산이 가슴 깊이 들어와요. 지도상에 표시돼 있지 않은 빙하나 설산을 발견하는 순간은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고요. 거기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내 존재를요.”

 

 

 

  

월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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