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반가

히말라야 등반 산악인들이 경험한 '신의 영역과 추락의 순간' ...

써미트 2009. 7. 30. 13:58

‘죽음의 지대’서 느끼는 공포와 전율

위클리경향 | 입력 2009.07.22 17:51

 
히말라야 등반 산악인들이 경험한 '신의 영역과 추락의 순간'

히말라야 8000m 이상 14개 고봉. 등반가들은 해발 7500m급 이상의 산을 '죽음의 지대'로 부른다. 히말라야를 등반한 스위스 등반가 에트와르 위스 뒤낭은 지난 1953년 그 지대의 특성을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 히말라야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인 대원들. 왼쪽부터 1999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지현옥씨,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 숨진 박무택씨, 2007년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한 오희준·이현준씨, 2008년 K2에서 사망한 황동진·박경효·김효경씨.

↑ 매년 수십명의 산악인이 8000m급 이상 히말라야의 산정과 계곡 곳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진은 2006년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히말라야 로체사르 원정대원들의 모습. <경향신문>

"인간은 6000m 정도의 고소에서는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7000m를 넘으면 고도 적응이 어려워진다. 이 고도에서는 적응한다 해도 그 시간이 제한된다. 휴식을 취해도 이미 소비한 에너지를 넉넉히 보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도 7000m에 이르면 '쇠퇴 현상'이라 부르는 중대한 장애가 일어난다. 처음엔 목이 아프다가 대수롭지 않던 염증이 악화되며 궤양이 발생한다. 동상은 유기조직에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한층 어려운 고비를 맞는다. 심장이 적응할 수 없게 되어 팽창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비타민 부족으로 식욕을 잃는다. 이처럼 생리학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높은 곳에 지나치게 머무는 자는 결국 '하얀 죽음'의 제물이 된다."

매년 수십명 히말라야에서 목숨 잃어

히말라야의 공포에 대한 이 고전적인 정의를 이미 수많은 산악인들이 극복해왔다. 그러나 그 공포와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매년 수십명에 달하는 산악인들이 8000m급 이상 히말라야의 산정과 계곡 곳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고미영씨가 추구했던 '무산소 등반'은 이 같은 공포와 위험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인간 실존의 결단이다. 1978년 산소통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라인홀트 메스너는 세계 산악사의 새 기록을 썼다. 그가 동료 등반가 페터 하벨러와 함께 해낸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은 기술보조수단 없이도 세계 최고봉에 오를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산에도 트릭을 쓰지 않고 오를 수 있다는 자신의 산악 철학을 실천으로 입증한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탐구해야 할 것은 산이 아니라 인간이다.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고 오르지 않았다. 그랬으면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했으리라. 나는 그저 이 자연의 최고 지점에서 내 자신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에베레스트의 장대하고 준엄한 모든 것을 내 팔에 안고 싶었다. 이런 일은 산소 마스크의 힘을 빌려서는 하지 못한다. 나는 유토피아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1944년 이탈리아 남티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돌로미테 산군을 오르며 등반을 익힌 메스너는 20대에 이미 알프스를 500회 이상 등반했다. 그리고 1970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밧을 시작으로 1986년 로체 정상에 오르면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이상 14좌(봉)를 완등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산악인들은 추락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날았다'는 표현을 쓴다. 옆에서 보면 틀림 없이 치명적인 상황이지만 그들은 '높이 뜬다', '풀려난다', '허공을 가로지른다', '한숨 돌린다'는 식의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1988년 가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추락을 경험한 엄홍길씨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휘청, 몸이 균형을 잃더니 허공으로 날리는 느낌이었다. 확보물은 물론, 무엇을 잡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끝없이 추락할 것 같았던 내 몸이 얼음 덩어리에 몇 번 세차게 부딪히더니 다시 가볍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곧이어 무엇인가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고, 몸이 얼음 사면에서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사지는 멀쩡했고, 눈보라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살았다."

추락 이야기 할 때 "날았다" 표현 써

고정 로프 맨 아랫 부분에서 그의 몸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추락 지점은 40m 위쪽이었다. 추락 순간 허리춤에서 꺼내 든 카라비너가 마지막 손동작에서 고정로프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2001년 8월 엄홍길씨에 이어 히말라야 14개봉 완등에 성공한 박영석씨도 무서운 추락의 경험을 갖고 있다. 1991년 그 역시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할 때다. 그는 동료 셀파 사다와 함께 암벽을 오르며 루트를 개척하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루트를 뚫고, 사다는 밑에서 로프를 공급하며 100여m를 나아갔는데, 어느 순간 로프가 올라오지 않았다. 아래를 보니 로프가 사다의 배낭에 끼어 아무리 잡아당겨도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당황한 사다는 순간적으로 로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왼손으로 얼음에 아이스바일을 꽂고 오른손으로 로프를 당기던 내 몸이 붕 떠올랐다. 설사면에 몸이 부딪히기가 무섭게 다시 추락하고 또 다시 아래 빙벽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100여m를 추락했다. 주변엔 선혈이 낭자했고, 그 피가 내 몸에서 나온 피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당시 제2 캠프에 머물러 있었던 미국 원정대가 셀파를 시켜 베이스캠프의 수술도구를 가져왔지만 마취약이 빠져 있었다. 박영석씨는 함몰된 얼굴을 마취약도 없이 꿰메는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공중에 매달린 채 엉엉 울었다"

1993년 봄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를 때 박영석씨는 다시 추락의 공포를 경험했다. 8500m 지점에서 악천후를 만나 그는 동료와 함께 제5캠프로 가는 직벽구간을 내려와야 했다. 그가 디뎠던 바위의 틈이 부스러지면서 끔찍한 추락이 시작됐다.

"툭, 하고 몸이 떨어지는데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이제까지 살아왔던 순간들이 빠른 속도로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죽음의 공포가 한없이 밀려왔다. 내 목숨은 신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몸은 한 없이 추락해가는데 그 때처럼 신의 존재를 명징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덜컥, 안전벨트에 하켄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소리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 공포. 그 고독. 나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한참을 온 몸으로 엉엉 울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고산지대에서 극도의 위험을 경험할 때,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안이 사라지고 지난 날들이 눈 앞을 스치며, 시간감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갑자기 가족과 친구가 생각나며 묘한 소리가 들리거나 환각 증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고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1975년 페터 하벨러와 같이 카라코람의 8065m 히든 피크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페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정상에서 일종의 열반을 체험했다."

죽음의 지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그것은 종말 속에서, 즉 죽음을 통해 생을 인식하는 일이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말대로 죽음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한데 껴안는 감정이다. 추락 직후의 순간, 고미영씨 역시 그 장엄한 일체감을 맛보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한 없이 비통하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생의 절정 속에서 숨졌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여성산악인 하그리브스 '엄마의 마지막산 K2'



산악인들은 가장 오르기 힘든 산으로 최고봉인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2위 봉인 해발 8611m K2를 꼽는다. K2는 파키스탄 내륙으로 쭉 뻗은 카라코람 산맥에 있다. 인도양에서 멀리 떨어진 카라코람 산맥은 매우 건조한 불모지대다. 여기에다 날카로운 피라미드 형태의 K2는 그 가파른 경사부터가 범상치 않다.



K2는 치명적인 악천후로도 유명하다. 산 중턱의 거대한 6개 빙하가 찬 공기를 뿜어대고, 짙은 구름이 감싼 정상에는 회오리 돌풍이 몰아친다. 지금까지 K2를 정복한 산악인은 100 명 남짓. 그런데도 희생자만 50명을 웃돈다. 등반 사망률 30%로 단연 최고다.



고미영씨 역시 K2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만난 적이 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죽음 또는 영광 : K2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역사상 최악 산악 사고의 하나'라고 규정한 지난 해 8월의 사고였다. 정상 아래에서 얼음 덩어리가 무너져 한국인 3명을 포함해 네덜란드, 세르비아, 노르웨이 등의 산악인 11명이 숨졌는데, 고미영씨는 정상에서 그들보다 조금 먼저 내려와 간신히 화를 면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성 산악인 알리스 하그리브스. 1995년 K2에서 서른 셋의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이다. 알프스 거벽들을 두루 오르고, 여성으로선 처음 무산소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에도 성공했다. 셀파의 지원도, 고정 로프의 도움도 받지 않고 무산소로 혼자서 오른 것이다.



K2에 오를 때도 그녀는 혼자였다. 악천후로 다른 등반대가 철수할 때 그녀는 홀로 검은색의 K2를 오르기 시작했다. K2 정상에서 내려올 때 북쪽에서 시커먼 구름이 다가왔다. 시속 160km가 넘는 폭풍이 반나절 동안 몰아친 뒤 그녀는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와 가족의 영적인 만남은 아름다운 책으로 남았다. < 엄마의 마지막 산 K2 > 가 그것이다.



그녀가 후에 K2를 등정하고 하산 도중 실종되었을 때 남겨진 그녀의 가족, 저자인 제임스 발라드와 톰, 케이트는 심장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상실감을 겪는다. 더욱이 톰과 케이트는 죽음의 개념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아이들은 엄마의 마지막 산 K2에 가보길 원한다. 그래서 3명의 유가족은 파키스탄의 K2로 여행을 떠난다. 이들은 적절히 슬픔과 상실감을 표출함으로써 스스로 극복하고 치유하게 된다. 치유의 힘은 또한 K2의 자연에서 나온다.



그들이 베이스캠프에 닿은 날 K2는 모처럼 기적같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들은 "정말 아름다워. 엄마를 이해할 수 있어. 이제 알 것 같아…." 라고 말한다. 제임스 발라드가 쓴 이 위대한 여정은 산악인의 고독과 죽음 이후에도 남겨지는 자연의 위대함, 그리고 인간 정신의 고결함을 잘 보여준다. 그녀의 묘비명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산들의 어머니여/당신이 간직한 그 놀라움들/이다지도 작은 인간이 어찌/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으리오."

알리슨 하그리브스도 고미영씨도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다 죽었다. 두 사람 모두 작은 인간이지만 크고,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를 남기고 간 산악인들이다.

한기홍 < 언론인 > glutton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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