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봉하에서의 7일간의 기록…전국서 400만명 조문 ...

써미트 2009. 5. 29. 08:49

봉하에서의 7일간의 기록…전국서 400만명 조문

기사입력 2009-05-29 06:41 기사원문보기
경상남도 김해의 봉화산 밑 자락에 자리잡았다 해서 이름 붙은 봉하마을은 지난 2002년말 ‘봉하의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크게 한번 들썩였다. 그리고 6년여의 세월이 지난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은 발칵 뒤집어졌다. 충격이 크다 못해 주민들은 아예 말문을 닫아버렸다.

충격은 이내 분노로 변했다. 퇴임 후 고향사람들과 오순도순 살아보자던 대통령을 정부ㆍ검찰이 들쑤셔놔 최악의 상황을 빚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렇다고 그저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똑같이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 수많은 조문객들의 발길이 봉하마을로 향했다. 농사일을 거두고 손님을 치르던 사이 어느새 분노는 가셨다. 하루이틀 지나면서 다시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써 얘기하고자 했던 게 무엇이었나를 떠올리게 됐다.


▶ “원망하지 마라”
= 지난 23일, 사람들은 한가롭기만 할 줄 알았던 토요일 휴일을 충격 속에서 맞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실족했다는 소식에 이어 사망 소식이 이어졌고, 또다시 단순한 죽음이 아닌 자결이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비난의 화살이 정부와 검찰로 향했다. 서거 소식이 있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던 조문행렬에 앞선 반응이었다. 시신이 봉하마을로 운구된 뒤부터 이 지역 일대에선 그간 노 전 대통령을 흠잡아온 보수 언론 색출작업이 이뤄졌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한나라당 측에서 보낸 조화(弔花)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한 주민은 “이렇게 당할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사람들은 노 전 대통령이 유서에 남긴 ‘원망하지 마라’는 얘기를 ‘원망스럽다’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 “하늘도 울었다” = 24일 낮 최고기온이 30도에 육박했음에도 수만 명의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조문객들이 기억하는 생전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그 누구보다 청렴하고, 소탈하고, 패기넘치고, 미소가 선한 대통령이었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한 길이라면 뙤약볕 아래 2㎞가 넘는 거리라도 기꺼이 걷겠다는 사람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 사이로 몇몇 정치인과 정부관계자 등은 불청객 취급을 당하며 노사모 회원들과 마을주민, 조문객들에 의해 마을 밖으로 내쫓겼다. 쉽사리 화를 삭이지 못한 노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침 내린 강한 소나기를 맞으며 “하늘도 우는가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 “다 놓으시고 편히 가시라”
= 25일 입관식에서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남편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했다. 5공 시절 청문회 스타로 뜨기 전부터 노 전 대통령은 꼭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권 여사 눈에 비치는 남편의 모습은 그야말로 ‘바보’의 모습이었을 게다. 대통령으로서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기 좋게 만들고자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일들이 도리어 발등을 찍는 모습에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괜히 정치를 하고 대통령을 했다”고 인정했다. 오죽했으면 퇴임 후 고향에 돌아와 처음 한 말이 “야, 기분좋다”였을까. 월요일에도 불구하고 전날보다 더 많은 조문객들이 봉하마을을 찾아 자결 직전에 담배를 찾았다는 노 전 대통령의 심경을 공감하고 돌아갔다. 이날 유족과 정부 측이 공동으로 국민장 장의위원회를 꾸렸다.

▶ 평온 되찾은 봉하마을 = 26일에는 전날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소란스러운 국내외 분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봉하마을은 안정을 되찾아갔다. 울분을 토해내는 것만도 바빴던 주민들과 노사모, 조문객들은 이제 봉하마을 곳곳에서 각자 제 할 일을 찾아 일을 하느라 바빴다. 수많은 추모 인파에도 불구하고 장례가 톱니바퀴 굴러가듯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원봉사자들의 공이 컸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일부터 서울에서 봉하마을까지 내려가 자원봉사를 하는 홍모(51) 씨는 “어차피 장사도 변변치 않은 터라 잠시 가게문 닫고와 여기서 담배꽁초 줍는 일을 한다”며 “특별히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들도 스스로 학교에 얘기해 현장학습 차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섰다”고 말했다.


▶ 그는 혼자였다?
= 27일 경찰발표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할 당시 수행 경호관과 함께 있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애초에 자결을 할 작정으로 등산에 나섰던 노 전 대통령은 일부러 경호관을 따돌리고 홀로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 순간 경호관 마저 곁에 없었다는 사실을 접한 사람들은 서글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날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으로 일시 석방된 이강철, 정상문, 이광재 등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 3인방은 구치소를 나서자 마자 빈소를 찾기도 했다. 이들은 때늦은 조문을 자책하며 오열을 토했다.

▶ 봉하마을 100만, 전국 400만 = 역대 대통령 장례식 가운데 가장 많은 조문객이 노 전 대통령을 찾았다. 이는 단순한 수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상생의 정치를 꿈꿔왔던 고인의 죽음을 통해 화합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자원봉사자 대학생 김모(21) 씨도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정국은 보인다”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의 뜻을 기리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 다시 이어진 조문
= 29일 오전 5시에 봉하마을에서 시작된 발인식은 6시에 끝났다. 주민들의 오열이 간간이 들리는 가운데 비교적 질서있게 마무리됐다. 천천히 움직이던 운구차가 서울로 향하는 속도가 조금씩 높아질수록 마을 주민과 지지자들의 흐느낌은 커졌다. 그리고 다시 조문이 시작됐다. 그를 기리는 마음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처럼 계속됐다. 운구차가 서울로 떠나고 조문이 다시 이어지는 동안 봉하마을에는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산자여 따르라(임을 위한 행진곡)”는 노래가 울려퍼지면서 국민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김해=백웅기 기자/kgungi@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