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빙벽 할머니' 황국희씨....

써미트 2009. 3. 11. 15:50

[이 사람의 삶] '빙벽 할머니' 황국희씨

기사입력 2009-03-11 15:00 기사원문보기
등산으로 암 극복… 71세에 히말라야 도전

“산이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물론이고 끝없는 도전정신을 가르쳐 준 것도 산이죠.”

11일 만난 ‘빙벽 할머니’ 황국희(72)씨는 일흔이 넘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건강을 뽐냈다. 43㎏의 왜소한 체구지만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이날도 오전에 ‘가볍게’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히말라야 임자체(해발 6189m)를 등반하고 돌아온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뿐이지만 먼길을 다녀온 황씨에게는 오랜 여행의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28일 히말라야 임자체 등반 중 황국희(왼쪽)씨가 함께 등반에 나선 김영희씨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운틴월드 제공

황씨는 “병원에서 내 신체나이가 48세라고 한다”며 “산이 나에게 무한한 힘도 주는 것 같다. 노인들은 한해 한해 체력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자랑했다.

황씨의 등산 인생은 중년의 무료함을 달래야겠다는 평범한 생각에서 시작됐다. 주부로 애들 뒷바라지에 행복을 느끼던 그는 43세가 되던 해 자기 삶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등산에 전혀 관심도 없었던 터라 시작이 쉽지는 않았으나 지역 주부교실 등산반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산을 알기 시작했다.

아들, 며느리를 대신 손자녀들을 돌봐야 해 잠시 산행을 중단했다. 그러다 53세가 되던 해 자궁암 판정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수술 뒤 28회로 예정된 방사능 치료 중 13회까지만 받았다.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 말을 듣지 않고 무작정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씨는 “‘나는 절대 안 죽는다. 나는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몸이 그런 상태에서 죽기살기로 전국 산을 다 다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황씨는 암을 극복했다. 담당 의사도 “건강하게 오래 사시겠다”며 감탄했다.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고 병이 나은 것은 산이 준 선물이라고 황씨는 믿고 있다. 

◇황국희씨가 강원도 춘천시 오봉산 암벽을 오르고 있다. 마운틴월드 제공
62세가 되던 해 황씨는 암벽 등반에 도전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마운틴월드 이규태 원장의 추천을 받고서다. 65세에는 빙벽 등반에도 나섰다. “무엇이 더 재미있느냐”고 묻자 그는 “빙벽 등반이 난이도가 높아 재미있다”고 했다.

황씨는 “바위와 빙벽 앞에 서면 두근거리다가도 오르기 시작하면 마음이 편하다”며 “머리 허연 늙은이가 겨울이면 유명한 빙벽을 오르고 있으니 내 별명이 ‘빙벽 할머니’가 됐다”며 호기 있게 웃었다.

황씨의 도전은 끝이 없었다. 국내 유명하다는 산, 암벽은 거의 다 오르고 외국 산에 족적을 남기고 있다. 스위스 몽블랑, 융프라우,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일본의 다테야마, 백두산 종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체 등 등정에 성공한 해외 고봉도 손으로 꼽기 어렵다. 일본 산 등정 기회가 많아 몇 년 전부터 일본어도 배우고 있다.

황씨는 “그래도 우리 북한산이 가장 아름답다”며 “서울 사람들은 먼 산을 찾아다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산은 황씨의 고희 잔치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산악회 회원들이 2007년 황씨의 70세 생일에 케이크를 준비해 북한산 인수봉에서 조촐한 잔치를 열어줬다.

몇 년 전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산 등반에 성공한 일본 등산인 다베이 준코와 일본 산악회 회원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함께 북한산을 올랐다고 한다. 황씨는 “일본 산악인들이 북한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감탄했다”고 전했다.

지난해는 황씨 30년 등산 역사에서 잊지 못할 해다. 히말라야 임자체에 도전했으나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황씨에게는 ‘첫 등정 실패’의 경험이었다.

당시 등반에 10년 넘게 함께 산에 오른 김영희(56·여), 이인순(56·여)씨도 도전했다. 등산으로 김씨는 유방암을, 이씨는 우울증을 이겨냈다. 주부 3명은 지난해 등반을 위해 3년을 훈련했다. 지리산 종주, 설악산 서부능선 등 어려운 코스만 골랐고, 영하의 추운 겨울날씨 속에 텐트 없이 산에서 잠까지 자며 준비했다. 김씨와 이씨의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황씨는 “갈 데까지 가보자”고 힘을 북돋았다.

지난해 25일 출국해 산을 오르기 시작한 황씨는 이상하게 잘 먹지 못했다. 이를 견디고 등반에 나섰지만 정상을 불과 300m 앞둔 빙벽에서 등강기가 고장 났다. 영하 날씨 속에서도 장갑까지 벗고 등강기를 고쳤지만 시간이 지체돼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왼쪽 검지와 중지에 동상을 입었다.

황씨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아픔을 겪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실패해 실망이 너무 컸다”며 “사람이 충격을 받으면 말도 못한다고 하지 않나. 나도 하루 이틀은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는 “산행 실패로 배운 것이 많다. 그동안 수십년 산행에도 다친 적이 없어서 산을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교만했던 것 같다. 준비가 안 된 나를 산이 받아줄 리 없지 않은가”라며 “실망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몸을 다져서 다음에 또 도전해 보자고 결심하고 털어냈다”고 말했다.

황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주일에 세 번 산에 오른다.

80세까지 암벽을 오르고, 죽기 전 꼭 다시 한 번 임자체에 도전하고 싶다는 황씨. 그는 “처음부터 산 정상에 오르려 하면 금방 지치고 꾸준히 하지 못한다”며 “인생도 마찬가지다.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요즘 어려운 시기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경 기자 l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