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반가

고산 등반가 김재수

써미트 2009. 11. 16. 15:38

등반가 김재수

 

 

 

 

 

 

김재수(金在洙.48)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소체질’의 산꾼이다. 그는 얼마 전 파키스탄 낭가파르밧에서 사망한 고미영씨의 매니저로 함께 고산등반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도 히말라야 고봉을 오르면서 지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고소적응력이 뛰어난 산꾼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8천 미터 14좌를 완등할 유력 후보로 기대를 모았다. 모든 등반가들이 부러워하는 고소에서의 강인함은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의 경우 끊임없는 단련을 통해 이러한 능력을 만들었다. 히말라야 등반 초창기 몇 해 동안은 마라톤 풀코스에 해당하는 거리를 매일 달렸을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거듭했다. 그의 능력은 이런 뼈를 깎는 수련 끝에 얻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하며 산동네를 뛰어다니며 체력을 키웠습니다. 그런 경험이 산을 오르는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영화 친구의 무대로 알려진 부산 남부민동의 산동네에서 자랐다. 어려운 집안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산꼭대기 집까지 물지게를 져야 하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문을 돌리게 된 것은 3학년 때 당한 교통사고가 발단이 됐다. 다리에 심한 복합골절상을 입어 1년 동안 깁스를 했던 그는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달리기를 선택했다. 물론 어려운 형편에 돈도 벌어보자는 욕심도 있었다. “5학년 때부터 산동네에 석간신문을 돌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개 월이 지나고 나니 다리가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왕 시작한 거 새벽에도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2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뛰면서 두 다리의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번 돈으로 중학교 들어가는 등록금을 대고 교복도 샀습니다.” 그는 까까머리 중학생 때도 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중학교 3년 동안 그는 왕복 세 시간 거리를 걸어서 등하교했고, 산꼭대기에 있는 학교까지 뛰어오르며 체력을 길렀다. 그는 달리기를 좋아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산에 다니는 밑거름이 됐다고 믿고 있다.

 

 

 

그가 등산을 접하게 된 것은 네 살 터울의 누나 덕분이었다. 반항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중학교 졸업 후의 공백기에 누나가 그를 산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살던 곳은 ‘정말 별난’ 동네였다. 잘못된 길로 빠질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는데, 등산은 그런 함정을 피해갈 수 있도록 좋은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누나에 이끌려 부산 인근의 야트막한 산으로 캠핑을 갔다가 우연히 목격한 운해에 홀딱 반했습니다. 산에 다니면 이런 멋진 광경을 자주 볼 수 있겠다 싶어서 친구들과 여기 저기 몰려다녔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밥해먹는 재미에 캠핑을 했습니다. 그러데 정작 등산의 본질을 알려준 것은 낡은 책들이었습니다.”

 

산에 대한 목마름에 헌책방을 뒤지다가 일본서적과 등산잡지를 접한 그는 등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암벽과 빙벽등반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히말라야의 존재에도 눈을 떴다. 독학으로 등산의 세계를 파고들던 그는 전문등반으로 방향을 급선회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던 그는 전문등반을 배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누나에게서 선물 받은 로프 한 동과 카라비나 2개를 들고 무작정 금정산 부채바위를 찾아갔다. 그의 기억으로는 77년 3월 14일이 처음으로 바위를 본 날이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그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언제나 부채바위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암벽꾼들의 몸짓을 흉내 내며 한 코스씩 바윗길을 섭렵했다. 그러면서 등반 파트너도 생겼고 ‘바위 잘하는 놈’으로 산동네에 소문이 났다. 열정적으로 암벽등반에 몰입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가장 잘했던 것이 등산입니다. 잡기에는 재능이 없고 오로지 등산이 저의 유일한 취미입니다. 험악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엇나가지 않았던 것도 등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마친 김재수는 군 제대 후 20대 초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발을 들인 곳은 신발부품제조업체. 하지만 그가 바라는 산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직장 생활을 접고 자기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돈도 벌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등반을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1987년 그는 전세 보증금 5백30만원을 빼내 백산실업이라는 신발부품제조업체를 차리게 된다. 아내가 경리를 맡고 처남은 공장장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밖에 나가 일감을 구해오는 영업을 전담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분야지만 영업을 맡아 일거리를 받아올 곳은 없었다. 그래서 동종업계의 남는 일거리의 도맡아 처리하는 임가공으로 공장을 꾸렸다. 그렇게 8년이 흐른 이후 서서히 사업이 궤도에 올랐다. 이제 그는 부산경남 지역 산악인들 사이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불리고 있다. “공장 만들고 나니 살 곳이 없어서 바로 옆 비닐하우스에서 8년간 생활했어요. 둘째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집을 그렸는데, 그게 비닐하우스지 뭡니까. 그림을 보는 너무 놀라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공장 근처의 기와집에 세를 들어 이사를 간 기억이 납니다.”

 

 

 

 


사업체를 운영한 이후 그는 본격적인 고산등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가 독립을 원한 것도 이렇게 마음먹은 등반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 기회는 90년에 찾아왔다. 부산 산악인들과 일본 산악인들이 합동으로 추진한 에베레스트(8,848m) 원정대였다. 그는 등반지역을 정찰하고 누구보다 훈련에 열심히 참가는 등 첫 히말라야 등반에 공을 들었다. “정찰대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갔을 때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심한 고소증에 고생을 했습니다. 이러다가는 등반이고 뭐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훈련으로 극복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묘안이 없어서,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20km씩 달리며 체력을 다졌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고소에서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다. 당시 함께 등정한 대원들보다 무려 2시간이나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고, 동료를 기다리며 2시간30분간 정상에 머무르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에베레스트의 성공 이후, 그의 고산등반 행보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91년에는 대산련 시샤팡마(8,027m) 남벽 원정대에 참가해, 당시 한국 최고의 고산등반가로 꼽혔던 김창선씨(49.성대OB)와 함께 남벽을 돌파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 이 벽을 오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등반이었다.

 

시샤팡마 등반을 계기로 그는 한층 진보된 등반을 펼치기 시작했다. 로부제 동벽 등반도 해낼 수 있었고, 칸텡그리(7,010m)에 이어 초오유(8,201m)와 포베다(7,435m) 단독등반에도 성공했다. 또한 그는 96년 엄홍길씨와 함께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구아(6,959m) 최단시간 등하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일반인들이 고소적응을 완전히 마친 다음에도 사나흘 걸리는 등반을 단 10시간 만에 마친 것이다. ‘고소체질’들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던 그는 99년 가셔브룸4봉 등반을 끝으로 히말라야 고산등반에서 조용히 발을 뺐다. 운영하던 사업체가 자리를 잡으려면 계속해 장시간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규모 인원과 큰 비용, 오랜 기간이 걸리는 원정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한 달 이내의 짧은 기간에 다녀올 수 있는 등반은 계속했다. 산과의 연줄을 놓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다. “저라고 8천미터 14좌에 대한 욕심이 없었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경쟁적으로 고봉을 오르기에는 여건도 시간도 허락지 않습니다. 그래서 14좌는 60세쯤에 끝내는 것으로 궤도를 수정했습니다.”

 

  

 

  

욕심을 줄이고 천천히 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2005년 8천 미터급 고봉 가운데 하나인 로체를 등정했다. 하지만 이 등반은 일본 청소등반가를 돕는 차원에서 참가했던 것이지 주도적으로 원정을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고산등반에 뛰어든 것은 2007년 에베레스트 등반대를 꾸민 것이 계기가 됐다. “경남지역 후배들에게 등반 기회를 열어주자는 취지로 만든 원정대였습니다. 일반인들이 잘 아는 에베레스트와 K2만 끝내면 다른 등반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선배로서 이 두 등반만 만들어주고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원정대를 꾸린다는 소문이 나니 등반에 참가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김재수라면 믿을 수 있다며 멀리 미국에서 찾아 온 분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후배들 후원 차원에서 실비보다 조금 더 많은 참가비를 내고 원정대에 합류시켰다. 상업등반대와 경남등반대의 혼합적인 성격이 된 것이다. 이 등반에 고미영씨도 참가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는데 성공했다. “하산하면서 고미영씨가 브로드피크 등반에 함께 가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14좌 완등이 목표인데 자신은 고산등반을 모르니 도와달라는 겁니다. 저는 사업체 운영도 해야 하고 나이도 있어서 안 된다고 했지만 주장을 굽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번만 같이 가주겠다 약속하고 파키스탄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김재수와 고미영의 동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브로드피크 등반을 하며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고미영의 꿈을 이루는데 힘을 보태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라면 같이 등반을 해도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등반에 관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역할이 매니저의 임무입니다. 동영상과 스틸 촬영 등 기록도 제가 직접 했습니다. 처음에는 히말라야 경험도 쌓을 겸, 제가 올랐던 시샤팡마와 로체 순으로 등반을 진행했습니다.” 사실 그에게 매니저 역할은 봉사와 다름없었다. 사업체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까지 따지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시작한 일이라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또한 그 스스로도 8천미터 14개봉 완등의 영광을 안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2008년 그는 당초 계획대로 경남연맹 팀을 이끌고 K2 등반에 나선다. 이 원정 역시 에베레스트 때와 마찬가지로 선배들에게 원정경비를 받아 꾸렸다. 달라진 것은 고미영씨의 코오롱스포츠 팀도 함께 맡았다는 점. 하지만 K2 원정은 정상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경남연맹 대원 3명이 눈사태로 목숨을 잃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K2 등반 이후 김재수는 고미영의 파트너로 마나슬루, 마칼루, 캉첸중가, 다울라기리를 연이어 등정하며 14좌 완등을 향해 나아갔다. 무리한 등반 경쟁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예상보다 빠른 진행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등반은 7월 11일 낭가파르밧 등정 후 고미영씨가 추락사하며 멈춰 서게 됐다. “14좌 등반을 마친 다음 더 크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산악인을 이렇게 빨리 잃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올해 8,000m급 6개 봉 등정에 도전한 것은 고미영씨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녀의 능력으로 봤을 때 충분히 가능했던 목표였습니다.”

 

고미영이 실종된 뒤 김재수 대장이 통곡하며 우는 장면이 TV 화면을 통해 방영됐다. 8천 미터 고봉 10개를 함께 오른 절친한 동료를 잃은 슬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헌데 그 이후 한 언론에서 고미영의 가족이 공개한 메모 형식의 편지를 근거로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 양 보도했고, 온 언론이 그 기사를 받아 재생산했다. 그러나 김재수씨는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남녀가 2년 6개월 간 등반을 같이 했으니 그런 소문이 안 나면 이상한 겁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을 썼고, 여섯 살 아래인 후배에게 깍듯이 존대하며 거리를 뒀습니다. 고소캠프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베이스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텐트를 쳤을 정도로 조심했습니다.

 

가족이 제공한 메모의 대상자가 누구인지는 고미영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헤어지며 마음의 정리를 한 사람인데, 그런 관계를 저에게 대입해서 소설을 썼던 거지요.” 그는 산악계의 선후배 관계와 등반 파트너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 부족이 이런 오해를 불렀을 것으로 추측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이혼을 해 솔로였던 두 사람이 함께 등반하는 모습이 연인처럼 비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서로 목숨을 의지해야 하는 자일파트너와의 신뢰는 다른 어떤 인간관계와도 비교가 어려운 것이다.

  

 

 

김재수는 총 14번 히말라야 고봉 등정에 성공해 11개의 8천 미터급 봉우리를 올랐다. 그는 소속사인 코오롱스포츠와 힘을 모아 남은 3개의 봉우리도 마저 오를 생각이다. 먼저 올해 가을 안나푸르나를 등반하고, 내년 여름 파키스탄의 가셔브룸 1, 2봉을 오를 예정이다. “이제 와 14좌를 오른다고 해서 큰 의미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미영씨가 못 오른 3개 고봉에 사진이나 유품을 통해 그녀의 흔적을 남겨놓고 싶습니다.” 그는 고미영이 생전에 계획했던 고산등반학교 설립도 코오롱스포츠와 함께 추진할 예정이다. 히말라야의 하얀 산을 오르고 싶어 하는 이들을 도와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이르면 내년 초 초오유를 시작으로 일종의 상업등반대와 고산등반교육을 연계하는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상업등반에 대한 산악계의 시각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0세 이상의 고산등반 희망자들의 신청을 받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안전하고 성공적인 등반을 돕는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그에게 등산은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고산등반교육을 계획대로 진행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산에 헌신해야 한다. 산이 인생의 대부분을 지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술 더 떠, 14좌 등반을 모두 마치더라도 8천 미터 봉우리는 계속해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 히말라야의 고산을 오를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는 그는 분명 범상치 않은 대한민국의 등반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