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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받아보려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고 아첨꾼이 된다. 사랑 받으려면 참된 짓을 해야 하는데 참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잘 보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게 아첨이다. 이러한 아첨, 이것이 우리의 엄청난 미망이다. 나 자신에 있어서도 나의 허상에 빠지는 것이고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허상에 빠지는 것이다.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그 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소행이 미운 것이지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행이 미울 때 그 사람이 미워져 버린다. ‘00 새끼’ ‘xx 할 놈’ 이렇게 되어 버린다. 여기서 생각이 물 건너 가버린다. 냉정하게 말하면 정작 그 놈은 죽일 놈도 아니고 살릴 놈도 아니다. 나쁜 소행을 죽여야 한다, 악한 소행을 교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만큼 우리가 어리석다는 것, 사람을 보는 지혜가 없다는 이야기다.
나라는 물건, 이 물건은 이 순간에 착한 짓을 하지만 그러나 이 물건에서 언제나 착한 것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 물건은 악한 짓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물건 자체는 착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앞서는 착한 짓을 했고 뒤에는 악한 짓을 했다면, 이 측면에서는 착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착하지 않다면 착하기도 하지만 악하기도 한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이 물건은 착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걸 사구(四句)라 그런다,
사구(四句)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모든 존재는 있다. 현상으로 있다. 착하다 악하다는 현상이 있다. 일정한 분면에서는 분명히 착한 현상도 있고 다른 분면에서는 악한 현상도 있다. 또 그렇지만 없다. 왜인가? 착한 분면에서는 악한 모습이 없고 악한 분면에서는 착한 모습이 없다.
착한 것과 악한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단면적으로 보지 않고 통째로 보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이다.
그 다음, 다시 한 발 더 나아가면 착하다 악하다는 구분 자체가 부정된다. 이를 테면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선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다면 사람을 죽인 사실 자체는 선은 아니다. 선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오늘날에 전하는 고대의 문화유산들 치고 인간을 혹사하고 착취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없다. 이렇게 따져보면 선과 악으로 양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존재를 선악이란 개념으로 포착할 수가 없다. 존재는 선악을 넘어서 있는 개념이다. 그래서 선하다고도 할 수 없고 악하다고도 할 수 없다는,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또 다른 범주가 성립한다.
불교의 사구(四句)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사랑과 미움의 허상을 깨트리는 논리학이다. 존재의 실상을 향하는 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달리 공(空)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구(四句)에서는 존재를 바로 잡을 자는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를 바로 잡을 자는 그 자신뿐이다.
배영순(영남대 국사과교수/ baeysoon@yumail.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