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반가

산악인 허영호 "누가 했으면 안하죠. 초경량비행기로 평양 가고파" ...

써미트 2009. 9. 3. 14:25
"누가 했으면 안하죠. 초경량비행기로 평양 가고파"
 

 

2008-05-01 09:48

 

세계 7대륙의 최고봉과 양 극점을 밟았던 한국 최초의 산악인 허영호 씨. 그가 최근에는 하늘탐험에도 성공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초경량 비행기를 타고 7시간 여의 비행 끝에 국토 종단에 성공한 것인데요. 지난해 1월 같은 기종의 비행기로 국토 종단에 나섰다가 실패, 1년 4개월 여 만의 재도전 끝에 짜릿한 성공을 이룬 것이죠.

어렸을 때부터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는 허영호 씨. 다음에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과 평양을 왕복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는데요.

한국 탐험사에 기록을 남겨오고 있는 무한도전의 탐험가 허영호 씨를 4월 23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들어봤습니다.

◇ 첫 도전은 기체 이상으로 청산도 앞바다에 불시착

▶ 이러다 우주로 나가시는 것은 아닌가요?(웃음) 제가 로켓을 타려고도 했어요. 10년 전에 조사를 했을 당시 200만 불, 25억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1년 훈련하고 대기권 나가는 값으로. 정부나 기업에서 도와주지 않고는 너무나 큰 벽이었죠.사실 지금 이소연 씨는 엄청 늦은 거예요. 제가 그거 조사한지 10년이 넘었으니까요.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시면 우주를 다녀온 로켓이 잘 보관되어 있어요. 그거 보면 내가 저기 탔었어야 하는데 싶죠.

▶ 국토 종단을 위한 비행 구간은 어떻게 되었나요?

원래는 김포 공항이나 성남의 큰 공항에서 출발하기로 계획하고 준비까지 다 했는데, 당국에서 비행기가 너무 작고 정식 비행기가 아니라고 이륙허가를 안 내줬어요. 그래서 경기도 여주에 보면 이포나루라고 천서리 막국수로 유명한 강가가 있는데, 그쪽에 작은 간이 비행장이 있어요. 거기서 출발했는데, 제주도까지 직선거리로 500km이고 왕복 1000km였습니다.

▶ 그럼 초경량 비행기가 불법인가요?

불법은 아니고요. 보잉기 같은 국제선이 이륙허가 내듯이 똑같은 양식으로 이륙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보통 비행기 무게가 230kg 전후입니다. 그러니 연료를 많이 못 싣고, 중간 중간 연료를 보급하고 쉬었다 가야 하죠. 두 사람이 앞뒤, 혹은 양 옆에 탈 수 있는데, 보통 뒤에는 사람 체중만큼의 연료를 실어요. 장거리로 8시간에서 10시간을 비행할 수 있는 연료가 있어야 하니까요.

▶ 그 전에 한 번 실패하셨는데요, 그 원인이 무엇이었나요?

그때 기체의 방향을 잡아주는 방향타 ‘러더’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의 케이블이 좀 나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똑바로 비행이 안 되니까 바다에 내린 것이죠. 당시 제주도 중간 청산도 앞바다였는데, 중간 선회를 하다보니까 어선 대여섯 척이 보이더라고요. 그 중 가장 큰 노란 배가 가까이에 있기에, ‘그 배 앞쪽에 내리면 배가 서겠지, 건져 주겠지’ 하고 착륙을 했죠.

▶ 물에 착륙할 때 초조하고 불안하진 않으셨어요?

초조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물에 내렸을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론상으로만 배웠지 바다에 실제로 내려본 적이 없잖아요. 어떻게 물에 떨어질지 몰라서 충격이 올수 있는 GPS라든지, 비디오 기기 같은 장비를 바깥에 다 던져놓았죠. 그리고는 조종을 잘해서 땅에 착륙할 때처럼 그대로 부드럽게 떨어졌어요. 아주 잘 내렸습니다.

그 시간이 한 20분 정도였는데, 어떻게든 가보려고 노력을 하다가 그렇게 되었죠. 당시 제가 옷을 ‘드라이슈트’라고 바다 속에 들어가도 물이 안 들오는 옷을 입고 있었고, 방수 백에 삼일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식량과 SOS 기계가 있었어요. ‘SBS’라고 그 스위치만 눌러 놓으면 지구 위에서도 제가 어디 있는지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그런 장비들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당시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었죠.

◇ 어릴 때부터 비행기 조종을 꿈 꿔
 
▶ 어릴 때부터 산악인보다 조종사가 꿈이었다고요?

저희 어릴 적에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고 ‘쌕쌕이 간다’고 그랬잖아요. 비행기라고 안 불렀죠. 어릴 때부터 비행기가 좋았어요.

▶ 고향이 어디세요?

충북 제천입니다.

▶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언제 따신 거예요?

10년 전입니다. 제가 95년에 7개 대륙 최고봉과 남극, 북극점 밟고 하고 싶은 것을 다했어요. 그러고 나서 ‘또 뭐 도전할 것이 없는가’ 해서 어릴 때 꿈을 실천하기로 한 거죠. 그래서 비행기 조종을 배우고 공부를 하게 되었죠.사실 비행기 조종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20시간이 되면 혼자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요. 그럼 교관이 보고 솔로비행이 가능하구나 하면 시험을 거쳐서 자격증을 발급을 해줍니다. 그 과정은 별로 어렵지 않아요. 자동차 운전과 거의 비슷합니다. 큰 차이 없습니다.

▶ 땅은 내 발로 딛고 가지만, 비행기는 공중에 언제든 추락할 수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자동차는 가다가 이상이 생기면 도로에 멈추면 되지만, 비행기는 이상이 생기면 땅으로 내려와야 하죠. 그래서 비행기 엔진 꺼졌을 때 주위의 상황을 봐서 안전하게 글라이드를 하는 법을 교관들에게 배우게 됩니다.

◇ 남이 하지 않은 일을 목표로 세우고 도전

▶ ‘생떽쥐베리’나 ‘케네디 주니어’ 같은 분들도 경비행기 타다가 실종되었죠.

그분들보다 더 유명한 분으로 남극탐험을 최초로 하신 ‘아문젠’이 있습니다. 당시 열기구로 북극을 횡단해서 알래스카를 넘어오셨죠. 그 다음에 비행기 조종사가 됩니다. 그 후 자기 동료가 북극해에서 구조 요청이 와서 그쪽으로 간 이후, 두 분 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 그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인물이 계신가요?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욕심에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인생 이왕 지나가는 건데 열심히 해서 목표를 한번 세워보자고 한 것이죠. 누가 먼저 했으면 안 합니다. 원래 목표는 세계일주였어요.

▶ 요즘 청소년이 모험심이나 탐험심은 좀 적은 것 같은데요.

전체적으로 요즘 청소년들이 모험심이나 탐험심이 약합니다. 전 세계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 고행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는 누구든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그곳까지 가는 데는 엄청난 모험이 있어야 하죠.지금 젊은 친구들이라면 이 초경량 비행기 가지고 평양을 갔었어야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절대 미사일 안 쏩니다.

예전 독일에서도 젊은 친구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내려서 6개월을 살았거든요. 그 때는 정치적인 이유도 아니고 그냥 자기의 목표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그와 같은 모험심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우리 삶의 룰과 규정을 벗어나 도전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전의 목표를 가지고 말이죠.

▶ 한국 탐험사의 기록을 바꿔온 것으로 유명한데, 7대륙 최고봉에 남, 북극점을 도달하셨잖아요. 그 7대륙의 최고봉은 어디 어디 입니까?

각 대륙마다 최고봉이 있죠. 유럽 대륙의 최고봉은 보통 알프스, 몽블랑 등을 생각하시는데요. 알프스는 4700m 정도밖에 안됩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 최남단의 코카서스 지방에 5642m의 엘부르즈라는 곳입니다. 검은 대륙에서는 킬리만자로 5895m. 아시아 대륙의 최고봉은 에베레스트이고요. 북미 대륙은 알래스카의 맥킨리로 6200m 되죠. 또 남아메리카에서는 아콩카구아라고 안데스의 최고봉이 있습니다. 5900m가 넘어요. 그 다음에 오세아니아주 즉 호주, 뉴질랜드, 뉴기니아..여기에서는 뉴기니아 정글 한가운데 있는 칼스텐츠라는 곳이 있어요. 4884m로 적도 밑인데도 만년설이 있습니다. 남극 대륙에는 빈슨 메시프가 있죠.이렇게를 세븐 서밋(7 summit)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 가장 힘들었던 95년 북극점 횡단 원정길

▶ 한국인 17명을 데려간 악마의 정상 마나슬루를 무산소로 등정하셨어요.

제가 83년도에 솔로 등반을 했는데, 당시 등반 사상 세 번째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 무한합니다. 원래 의학적으로 절대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무산소로 갈 수 없습니다. 정상의 기압과 공기가 원래의 1/3정도 밖에 안 되거든요. 누구든지 정신력과 체력을 구비하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만 무너져도 죽음으로 끝납니다. 등반과 탐험은 정신력이 먼저고 그 다음에 체력입니다.

▶ 가장 오르기 어려웠던 산은 어디입니까?

87년 12월 22일 겨울 동계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정상에 오른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등반이죠.

▶ 벌써 20년이 흘렀네요?

예. 그래서 제가 지난 해 20주년 기념 등반으로 해서 5월 17일에 정상을 혼자 갔다 왔어요.20년이 지났지만 나이든 만큼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체력 단련도 하고, 저압 산소실에서 훈련도 하고, 그리고 도전해봤는데 정상 뭐 충분히 가겠더라고요.

▶ 아니 특별한 홍삼이라도 드시는 거예요?(웃음)

특별하게 먹는 것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훈련이에요. 저도 3~4개월 훈련 안하면 심폐기능을 체크하면 폐활량이나 맥박수가 일반인들과 똑같아집니다. 훈련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폐활량도 커지는 등 몸이 변화해요. 그러지 않고서 그냥 앉아있다 등반하면 정상 못갑니다.

▶ 가장 힘든 원정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산보다도 제가 95년에 북극점을 횡단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러시아 최북단 섬에서 북극점을 찍고 캐나다로 넘어오는데 1800km를 영하 50도에서 걸어봤죠. 처음 기획할 때는 답이 안나왔어요. 대충해도 4개월이 걸리더라고요. 그 120일 동안 한사람이 먹을 식량만 해도, 200kg인 거예요. 1800km에 200kg 거의 불가능했죠.

하지만 욕심이 생기다 보니 자꾸 계산을 짜 맞추게 되었죠. 그러면서 ‘에라, 한번 해보자’ 대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너희들 갈래? 가겠습니다.’ ‘그럼 집사람에게 가서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써와라’그렇게 해서 가게 된 것이죠.

▶ 영하 50도에서의 대, 소변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소변은 서서 보는데, 바람을 꼭 피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중요한 곳에 동상이 생겨요. 우리가 늘 우스개 소리로 하는 것처럼 소변보는 즉시 고드름이 달리지는 않아요. 제가 영하 50도에서 해봤는데 그렇지는 않고, 하지만 대변보는 것은 힘듭니다. 블리자드라고 바람이 늘 불기 때문에 허리춤 끌러 놓고 힘주기 직전에 하나 둘 셋하고 신속하게 봐야지, 길게 보면 동상 생깁니다.

▶ 도대체 그걸 왜 하십니까?(웃음)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웃음)

◇ 에베레스트 입산료만 1억, 스폰서 구하는 것이 제일 힘들어

▶ 아이들과 사모님은 마음을 못 놓으시겠어요.

지금 애들이 다 컸습니다. 대학교 3학년에 군대도 다녀오고. 고등학교 졸업반인 딸도 있고, 애들이 초등학교 때 한참 등반을 많이 다닐 때는 6개월 이상 나가 있었거든요. 그때 집사람 이야기가, 아이들이 ‘아빠 오기만 하면 책상에 꽁꽁 붙들어 매 놓고 못나가게 하겠다’고 했다더군요.

▶ 스폰서 문제가 제일 힘들다고 들었어요.

북극 탐험 같은 경우, 대원 4~5명 정도의 규모에 3억 정도의 예산이 필요했고요. 에베레스트 같은 경우는 입산료만 10만 불, 즉 1억이에요. 그러니까 작은 등반대의 경우는 2억 정도, 10명 이상 등반대의 경우는 3억 정도 예산 확보를 해야만 행동에 옮길 수 있죠.그래서 많은 팀들이 훈련하고 준비해도 실행에 못 옮기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스폰서를 못 찾아서요. 아직 협찬 문화가 많이 약한 것 같아요.

▶ 허영호 씨가 한국 산악회에 남긴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가 고산 등반을 했을 때는 막 시작 단계였어요. 제가 87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가면서 고산 등반을 정점에 올려놓았죠.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이런 친구들과 제가 거의 7년, 8년 차이가 나거든요. 지금은 이 친구들이 저보다 더 큰 등반을 하고 있죠.최근 영국이나 노르웨이 같은 곳에 세미나 초청 받아간 적이 있어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남극이나 북극을 한번이라도 갔다 오면, ‘Sir'라는 작위를 주고 대우가 대단합니다. 모든 것이 다 VIP이고 공항에서부터 대사관 직원이 나와 환영을 해요.

하지만 우리는 위험한데 그런데 왜 가느냐는 그런 분위기거든요.우리는 산이 70%잖아요. 눈만 뜨면 산이고, 또 삼면이 바다라 물도 많은데요. 우리나라는 5000년 역사가 정적인 역사였잖아요. 이게 동적인 역사로 바뀌어야 하는데, 부모님들이 항상 ‘산에 가지 말라. 물에 가지 말라’고 교육을 시키니, 나중에 청소년들이 컸을 때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문화가 형성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 허약한 어린 시절, 몸 키우려 한 등반이 직업으로

▶ 어릴 때는 어떠셨어요?

어릴 때 별명이 ‘허깨비’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밤에 잠을 자면 그렇게 가위에게 눌렸어요. 그럴 정도로 엄청나게 체력이 약했습니다. 군대 다녀와서 결혼하기 전에는 체중이 54kg이 넘어본 적이 없었어요.

▶ 어떤 계기로 등반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까?

몸이 약해서 산에 열심히 다녔어요. 우리나라 산을 다닐 만큼 다니다 보니까 욕심이 났죠. 높은 산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 암벽, 빙벽 등반 기술을 다 훈련하고 나서 29살 때 마칼루라고 8400m되는 봉우리에 도전하게 되었죠.

▶ 당시 29살 젊은 허영호에 대한 인식은 어땠나요?

그때가 82년도였으니까, 굉장히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등반에 대한 인식도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7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상돈이 형이 79년에 매킨리 산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니 많은 주위 분들이 ‘상돈이도 죽었는데, 조심하라’ 이거예요. 그래서 못 가게 반대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 후배 산악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산악인들이야 열심히 등반 잘하고 있습니다. 준비에 있어서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잘 되고 있고 장비도 25년 동안 좋아져서, 조금 쉬워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스폰서만 잘 되면 저보다 잘 할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 요즘 젊은이들은 산에를 잘 안가잖아요.

체력적이나 정신적으로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약해져있어요. 제 친구 중에 투 스타로 사단장 하는 친구가 있는데, 요즘 친구들이 턱걸이 5개 하기가 힘들답니다. 군에 입대까지 했는데 말이죠. 게다가 정신력도 그렇고. 실제 전쟁이 나면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싶습니다.

▶ 아내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그때 제가 고향 제천에 살 때인데 가막산, 금수산을 주말마다 갔어요. 그때 만났습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 그냥 ‘너도 산 좋아하는 구나’ 싶어 관심을 갖게 되었죠. 대놓고 사랑 고백은 못했어요. 제가 내성적이라서 적극적이지 못했죠.

▶ 어릴 때부터 비행에 꿈이 있었으면, 사관학교를 가고자 하지는 않으셨나요?

당시 사관학교를 가려면 공부도 잘하고, 체격 조건이 완벽해야 했어요. 저는 그렇게 공부를 못해서 꿈을 접었죠.

◇ 무엇보다 챌린지 정신이 중요.

▶ 산악인의 꿈을 꾸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나라의 등반이 폭으로 보면 넓어졌어요. 상당히 많은 팀들이 히말라야도 갔다 오고 알프스도 갔다 오는 등 경험이 많아졌습니다.반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챌린지 정신’ 즉,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는 일은 유럽 등에 비해서 상당히 약합니다.

▶ 그런 도전에 적극적인 나라들은 어디입니까?

아무래도 영국, 노르웨이, 프랑스, 미국 이런 나라들입니다. 등산 탐험 쪽에서는 그쪽에서 가장 많이 도전도 하고, 또 성공도 하고요.이미 다른 사람이 다 정복했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복 했던 것을 다른 방법으로 더 빠르게, 더 힘들게 도전하는 것이에요. 더 쉽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등반과 탐험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거든요. 내용이 있어야 해요. 과정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목표 달성뿐만이 아니고요.

▶ 동료를 산에서 잃는 경험도 하셨을 텐데요.

저는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엄홍길, 박영석 옆에서는 8~9명씩 죽은 사람이 있는데, 저는 동상 걸린 친구도 한명 없습니다. 엄청난 행운이죠.그만큼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12시간 북극 탐험을 하고 텐트 안에 들어오면 꼼짝도 안하려고 해요. 하지만 꼭 발을 씻고 자라고 합니다. 발에 노폐물도 많고 혈액순환도 안 되니까요. 영하 40도 되는 밖에서 발 닦는데 1분도 안 걸립니다. 몸이 지치다 보니 행동을 안 하게 되는데, 저는 ‘빨리 나가. 안 씻어?’ 잔소리를 합니다.

탐험할 때는 양치질 5일에 한번하고, 다섯 명이 가도 칫솔을 한 개밖에 안 가져갑니다. 짐이 무게가 너무 많으니까요.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해서 그렇습니다. 탐험 떠날 때 대원들에게 듣고 싶은 음악 가져오라고 하면 두개, 세 개 들고 와요. 하지만 가다보면 버리고 버리고 해서 맨 나중에 남는 것이 테이프 하나 남습니다.

▶ 무거운 것은 전부 셰르파들이 들어주는 거 아냐, 하고 많이들 생각 하는데요.

많이 도와주긴 하지만 본인 것은 본인이 가져갑니다. 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장비는 본인이 들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등반에서 셰르파 역할이 크긴 큽니다.

◇ 아들, 딸은 산에 잘 안 가

▶ 2002년에 아들 재석과 함께 몽블랑에 오르셨다면서요.

아들이 등반을 좋아하면 가르쳐 주겠는데, 자기는 등산 안하고 돈 많이 벌겠답니다.(웃음)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들어갈 때 기념으로 몽블랑 가자 해서 정상을 같이 갔다 왔죠. 그 후에 ‘너는 유럽 여행이나 하고 와라’ 떨어뜨려 놓고 저는 돌아왔어요. 그 다음에 배낭여행 요령이 생기니까 친구들 데리고 유럽 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오더라고요. 그리고 올해 고등학교 졸업한 딸내미가 있는데, 딸도 산에는 잘 안갑니다.(웃음) 손자 손녀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다니면서 얘기해 주고 싶어요.

▶ 아내는 뭐라고 하십니까?

저의 집사람이 눈만 마주치면 저에게 ‘어디를 또 도망가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가고 싶은 데가 많은 것을 어떡합니까. 집 떠나면 즐겁고.(웃음)가정을 버릴 수는 없지만 구속을 벗어난 자유가 크고, 또 자연 속에서 얻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에 집에 있으면 답답하죠.

▶ 국내에서는 주로 어떤 산에 다니십니까?

저는 주로 하남에 있는 검단산 자주 가고요. 특히 남한산성 자주 갑니다. 성곽 도는 3시간 코스요.다른 분들이 보시고 ‘이런데도 오십니까?’ 그러세요. 땀이라도 흘리면, ‘허 대장님도 땀을 흘려요?’ 이렇게 말씀 하세요. 아주 저를 슈퍼맨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땀도 흘리고 앉아서 물도 마시며 천천히 오르거든요.(웃음)

▶ 산에 갈 때 주의 사항을 좀 알려주세요.

준비물로는 일단 복장이 중요하죠. 등산화를 신으시고. 배낭 속에는 비나 바람부는 때를 대비해서 방풍 재킷과 물 그리고 간식 정도입니다. 간식으로는 과일 조금과 초콜릿, 비스킷.. 요 정도. 과일로는 오이, 토마토, 당근 저 같은 경우 사과를 좋아해서 사과를 많이 넣고 다닙니다. 초콜릿은 두세 시간 단위로 조금만 먹어도 배가 안 고프니까 가져가시면 좋죠.

◇ 가깝고도 먼 북한에 있는 산을 가고 파

▶ 하늘에 오른 기분은 어떠세요?

일단 금수강산이 작게 보이죠. 걸어 다닐 때는 산 자체가 엄청 크고,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요. 하늘에서 보면 작게 보여요.게다가 우리나라 산에 벚꽃나무가 굉장히 많습니다. 또 제주도 가기 전에 보성을 지나는데 녹차밭인지, 보리밭인지 사이사이에 유채꽃이 섞여있는데 참 멋지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비행하시면서 뒤집힐까봐 아찔했던 순간은 없으셨어요?

초경량 비행기라 엔진이 작아서 물론 큰 비행기보다 강할 수는 없는데, 구조 자체가 뒤집히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 앞으로 또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제주도 1000km를 다녀왔으니까요. 이제 북쪽 평양도 가보고 싶어요. 7개 대륙을 다 다녀봤는데, 북쪽에 있는 산을 지금까지 못 갔어요. 너무 가기 힘들더라고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 김효정)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  출처:노켯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