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등반가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에 도전하는 산악인 오은선 대장

써미트 2009. 8. 20. 11:01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에 도전하는 산악인 오은선 대장
고(故) 고미영대장 사진 품고 내달 안나푸르나로 떠나
"행복해서 올랐던 산이 이젠 인생의 목표 던져줘"

사선(死線)을 수없이 넘나든 '철녀(鐵女)'의 첫인상은 예상과는 달랐다. 보통 산악인들의 얼굴에 훈장처럼 자리 잡은 동상 흔적 하나 없는 그는 "생각보다 키가 작죠? 프로필엔 1m55인데 실제는 1㎝ 더 작아요"라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座) 등정에 도전 중인 오은선(43·블랙야크)씨를 15일 서울 용마산 폭포공원에서 만났다. 지난 3일 가셔브룸Ⅰ봉(해발 8068m) 정상을 밟아, 13좌 등정을 이룬 그는 오는 9월 중순쯤 마지막 남은 안나푸르나(8091m)를 오를 계획이다. 낭가파르바트(8126m)에서 돌아간 고미영 대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서.

날다람쥐 오은선

오씨는 올해만 4좌의 정상을 밟았다. 무서운 속도만큼 놀라운 것은 그가 13좌 중 11개 봉우리를 산소통 없이 '무산소 등정'을 했다는 사실이다. 오씨는 "대자연을 있는 그대로 만나고 싶어 무산소 등정을 고집한다"고 말했다.

오씨는 중간 캠프 수를 줄여 3~4일 만에 정상을 밟는 '속공(速攻)'을 선호한다. 남자 동료는 부담스럽고, 실력이 비슷한 여자 팀원을 찾기 어려워 셰르파만 데리고 단독등정하는 것도 오씨 특유의 등반 스타일이다.

'날다람쥐'라는 별명처럼 등반 속도가 빠르고 몸이 날렵한 것은 오씨의 타고난 신체적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2001년 태릉선수촌에서 체력 테스트를 해보니, 마라토너 황영조보다 피로 회복 속도가 빠른 것으로 나왔다. 적혈구와 헤모글로빈 증가량도 많아 탁월한 고지대 적응 능력을 갖췄다고 한다. 산악인에겐 흔하디흔한 동상 한 번 걸린 적이 없는 '축복받은 체질'이다.

오은선씨는 밝고 쾌활했으며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씨는 “제 장점은 산에선 땅의 일을, 땅에선 산에서의 일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극한의 그곳, 8000m

인터뷰 도중 오씨는 지명과 사람 이름을 종종 헷갈렸다. 기자가 궁금증을 보이자, "고산 등정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93년 에베레스트를 다녀왔을 땐 집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 났어요. 8000m에서 겪는 극한의 경험은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워요."

'8000'은 인간의 한계와 관련된 숫자다. 해수면의 20~30%에 불과한 산소량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소 증세'는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두통과 구토, 동상, 설맹(눈에 반사된 자외선이 눈을 자극하여 일어나는 염증) 등도 산악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다.

오씨는 2004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 정상에서 내려오다 마지막 캠프(8300m)를 앞두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다른 원정대의 셰르파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무섭도록 평화로웠어요. 이렇게 잠이 드는구나 싶었죠. 하지만 산에서 죽기는 싫었어요."

'죽음'에 관한 대화는 자연스레 고(故) 고미영 대장 얘기로 이어졌다. 오씨는 자신과 14좌 완등 경쟁을 펼쳤던 고씨가 지난달 11일 추락사하기 직전 산에서 조우했다. "오후 1시47분 정상을 밟은 뒤 내려가다 올라오는 미영이를 만났어요. 미영이가 웃으며 '축하합니다'라고 해서 '잘 갔다 오라'고 했죠. 오후가 되면 악랄해지는 낭가파르바트를 알기에 걱정이 있었는데…." 오씨는 "주위에선 우리의 경쟁이 지나쳤다고 하지만 미영이는 알 거예요. 서로 얼마나 힘이 됐는지"라고 했다. 오씨는 22일쯤 고씨의 유해가 있는 전북 부안을 찾아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할 것이라고 오씨는 말했다.

지난 6월 낭가파르바트 등반 당시 오은선씨의 모습. 그녀는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기분 좋은 일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블랙야크 제공
꿈의 14좌 완등을 향해

내달 10일쯤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오씨는 요즘 요가와 수영 등 가벼운 운동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점점 초조해진다. 심한 눈사태와 곳곳의 크레바스(crevasse· 빙하 속의 깊은 균열)로 악명 높은 안나푸르나는 지금까지 한국 원정대 14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다.

오씨와 여성 최초 14좌 완등을 놓고 경쟁하는 이는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칼덴브루너와 스페인의 에드루네 파사반. 12좌를 오른 칼덴브루너는 등반 시즌이 서로 다른 에베레스트와 K2를 남겨 놓고 있어 사실상 올해 완등이 어렵다. 시샤팡마와 안나푸르나를 남긴 파사반이 등정을 서두를 경우 내달 안나푸르나에서 오씨와 마주칠 수도 있다.

"주위에선 14좌 완등을 꼭 해야 하냐고 물어봐요. 하지만 누군가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져야 한다면 제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행복해서 올랐던 산이 이제는 인생의 목표를 던져준 거죠."

수원대 산악부 출신으로 서울시 교육청 공무원(8급) 생활을 하던 오씨는 1993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모집 공고를 보고 돌연 사표를 던졌다. 그 후 운영하던 스파게티 가게도 2000년 K2 원정을 떠나자는 박영석 대장의 제안에 접었다. 결혼도 물론 뒤로 미뤘다.

"등정의 기본은 체력 안배예요. 최후의 20%는 만약을 위해 늘 남겨 놓으라고 하죠. 지금까지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어요. 14좌 완등을 하고 나면 행복하게 산을 오르는 것이 뭔지 여유 있게 생각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또 어디가 됐든 올라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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